생활 정치/환경 노동분야

경상시론 응답하라 밀양 2- 역지사지/ 펌

질고지놀이마당 2014. 2. 6. 15:05

오피니언경상시론
[경상시론]응답하라 밀양 2-역지사지(易地思之)다수의 행복, 공리주의 명분 아래
시골지역에만 피해 전가
소통위해 남의 말 듣는 자세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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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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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문완 울산대학교 교수·법학과  
 

설에 울산mbc가 만든 다큐 ‘먼당에 올라’를 봤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 이야기다. 울산(또는 경상도)사투리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먼당’부터 시작해야겠다. 먼당은 동네 언덕배기를 말하는데, 필자가 자주 들은 말은 ‘만디’로 마을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이 다큐는 어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동네 먼당에 오르고 싶다는 유언을 하고, 상주가 시신을 묘지에 모시기 전에 그 만디에 들러 노제를 지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죽어서라도 조상의 땅을 지켜보고 싶은 할머니의 염원을 잘 보여준다. 그게 사람이다. 그래서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자기 굴로 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이런 장면도 있다. 60년대 중반 정부가 고리 원전을 짓기로 해서 고향에서 쫓겨나 서생면의 어느 마을에 정착했다가 이제 또 다시 그 고리 원전의 후손(5, 6호기) 때문에 또 제2의 고향을 잃게 된 사람의 기막힌 사연이다. 첫 번째 쫓겨날 때야 군사정권의 폭압이 있었다고 치고 이 대명천지에도 또 쫓겨나야 한다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본주의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공리주의(功利主義)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애당초 공리주의는 이런 물적인 측면을 말한 게 아니라고 한다.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때 행복이 극대화한다는 보통선거제도의 이론적 근거였다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고 그 중지(衆智)가 사회를 발전시키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이치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생각이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소수가 참아야 한다는, 본말이 전도된 모습으로 변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롤즈나 마이클 샌델 같이 정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첫 번째 검토대상을 공리주의에서 찾고 있다. 공리주의에서 벗어날 때 정의를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수의 행복은 소수의 불행을 불가결한 요소라고 보는 시각 자체의 교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안고 가는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핵의 위험에 둔감해서인지 정부의 핵발전소 건설 정책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우리 사회는 변화가 너무 빠르고 기억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습성이 있어서인지 일본 후쿠시마의 교훈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오늘도 한데에서 고생을 하고 있다. 이런 교착상태를 타개하는 길을 역지사지라는 오래된 해법에서 찾고 싶다. 밀양 송전탑을 건설해야 하는 이유가 울산에서 만든 전력을 서울까지 전하려는데 있으니 발상을 전환해서 아예 서울에서 발전을 하면 어떨까? 이 방안은 가장 효율적으로 전력을 만들고 쓰는 방법일 것이다. 굳이 전력을 옮기는 데 드는 비용이 들지 않을 터이니.

서울에는 발전소로 쓸 만한 명당도 꽤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청와대와 국회의사당, 정부청사가 그러하다. 이곳에 발전소를 만들고 그 전기를 서울 시민이 값싸게 사서 쓰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닐까? 핵 발전이 안전하다니 문제가 될 것도 없을 터이고. 그게 아니고 핵 발전이 안전한 게 아니라면 왜 그 고통을 시골 사람들이 온통 누려야 할까? 이게 역지사지의 해법이다. 창조경제,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시대는 발상의 전환을 간절히 요청한다. 필자의 대안이 바로 그 해법이라고 자신한다. 이 글을 서울 사람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역지사지가 가능하려면 우선은 남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차원이 높은 얘기이고 소통을 위해서는 듣는게 전제가 되기 마련이다. 귀는 둘이고 입은 하나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그 입은 밥을 먹는 데도 쓰이는 것이니 말하고 듣기의 비율은 1:2가 아니라 1:4가 되어야 마땅하다. 서양식으로 표현하자면 남의 말을 듣고 공감하는 것(sympathy)인데 요즘은 sympathy로는 부족하고 empathy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개념은 수동적인 같이(sym=together)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em=enter)을 의미한다. 어떤 경우이든 남의 얘기를 듣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코 4,9)이다.

오문완 울산대학교 교수·법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