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에 살고있는 친구와 느닷없이 의기투합이 되어 한바퀴 돌고 오자고 하여 수원에 있는 나를 태우러 왔다.
아침부터 비가 오기 시작해서 언제 그칠지 모르는데 일단 가방에 몇가지 챙겨넣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키로 하고 양평으로 떠났다.
양평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일어나니 비가 조금 그쳤는데 예보는 오후부터 갠다니 출발하는데 문제는 없겠다.
지도를 보고 일단은 방향을 태백쪽으로 하여 동해안쪽으로 코스를 잡고 위도상 단거리를 택하여 국도,지방도를 이용하여
쉬엄쉬엄 가면서 피곤하면 서로 핸들을 바꿔 잡기로 하고 친구의 차에 올랐다.
양평을 출발해 37번국도를 따라 장호원까지 간뒤 38번국도로 제천,영월로 들어섰다.
영월에 있는 단종묘소인 장릉에 먼저 들러보았다.
장릉은 조선6대 단종(端宗:1441~1457) (재위 1452∼1455)의 무덤으로 조선왕조의 왕릉이 42기중 41기가 모두 서울,경기지방에 있으나 유일하게 단종묘소만이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유배지에 남아있어 단종애사의 애절한 뜻이 더한곳 이기도 하다.
"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 (자료발췌)
일시 : 2009.05.12
▲ 장릉입구의 안내소와 매표소
▲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앞에 박충원 낙촌비각 (朴忠元 駱村碑閣)을 볼수 있다.
▲ 낙촌(駱村)은 문경공(文景公) 박충원의 호로써 중종(中宗) 36년(1541년)에 영월군수(寧越郡守)로 부임하여 현몽으로 노산묘(魯山墓)를
찾아 수축 봉제(修築 奉祭)한 사적을 기록하였다 한다. 1973년 4월 박충원의 후손들이 세웠다 한다.
▲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홍도(嚴興道)의 충절을 새기고자 영조2년(1726년)에 세운 정려각(旌閭閣)
▲ 정려각 앞에 작은 홍살문이 서있다.
▲ 신성한 곳임을 표시하는 홍살문(紅箭門)은 정자각과 서로 마주보고 일직선상에 있으나 이곳은 직각으로 굴절되어 있다.
▲ 영천(靈泉) - 정조때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 부사 박기정이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 정자각(丁字閣 )과 단종비각
▲ 정자각(丁字閣 )앞의 참로(參路) - 신도(神道)와 어도(御道)가 직각으로 굴절되어 홍살문과 연결된다.
▲ 정자각에서 제를 올리는 방향이 능의 측면쪽이 되는 특이한 위치이다.
▲ 정자각에서 본 홍살문 방향
▲ 예감(瘞坎) - 제사후 축문을 태우던 곳
▲ 참배로를 보수하고 있는중이다.
▲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고 무인석도 없다.
▲ 명릉(明陵)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長明燈)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 능 위쪽에서본 정자각
▲ 수복실
▲ 장판옥(藏版屋) -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32인,조사위(朝士位) 186인,환자군노(宦者軍奴) 44인,여인위(女人位) 6인
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정조15년에 건립하였다.
▲ 단종비각내의 비석의 앞면
▲ 재실
▲ 입구에 들어서면 단종역사관을 먼저 보고 가는게 관람에 도움이 된다.
▲ 이곳을 방문하셨던 어르신들의 사진을 몇컷 찍어드리고 메일로 보내 드리기로 하였으나 일러준 주소가 틀리는지 반송이 되었다.
혹시나 아시는 분들이 계실까하여 일행분들 사진을 올려본다. (이곳에 댓글이나 메일로...)
이곳에서 준비해간 먹을거리로 점심을 해결하고 동해안 쪽으로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