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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뮤어 트레일을 가다 4 / 캐시드럴 호수 선라이즈 초원

질고지놀이마당 2009. 7. 17. 12:23
[존 뮤어 트레일을 가다]시시때때 변하는 물빛 … “이곳은 호수의 세상”
선라이즈 초원과 캐시드럴 호수의 비경
세쿼이아 숲 지나 초원과 호수 어우러진 환상적 풍경에 넋 잃고
가파른 산길·고개 넘어서면 수채화 같은 캐시드럴 호수 감탄사
빗방울 듣는 고즈넉한 경관 바라A
 
2009년 03월 26일 (목) 20:40:02 김창식 goodgo@ksilbo.co.kr
 
   
 
  ▲ 캐시드럴 호수가에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일행.  
 
캘리포니아의 사막성 기후답게 습기가 없는 상쾌한 아침이다. 햇살이 워낙 강렬해 우리는 아침마다 두껍게 썬 블록을 발랐다. 오늘 오전에는 평평한 푸른 초원길이다. 온갖 야생화가 피어있는 주변 경관에 취해 휘파람이라도 나올 것 같다. 당연히 걸음은 가벼웠고 등에 진 배낭도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나머지 트레일도 이 정도였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고개를 넘고 세쿼이아 숲을 빠져 나가니 눈앞으론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선라이즈 초원과 호수였다. 언덕에서 바라다 보이는 그 푸른 초원과 호수는 달력에서나 봄직한 풍경이었다. 하긴 세계 달력사진으로 가장 많이 사용 된 것이 이곳에서 찍은 것이다. 초원 좌우로 초록의 침엽수 숲. 그 뒤편으로 더러 눈이 녹지 않은 산이 배경으로 우뚝 서있다.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그 풍경을 감상했다. 이런 풍경이 끝까지 계속 된다고 윤재일이 말했다. 존 뮤어 트레일 340km를 하루 평균 18km씩 걷는다면 약 20일이 소요된다.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휘트니산(4418m)을 비롯한 3500m에서 4200m를 넘나드는 고개와 수많은 봉우리들. 그리고 산과 산 사이의 수천 개의 호수. 아직 사람이 들어가지 못한 계곡과 절벽으로 시에라네바다 산군은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 트레일이 지난다. 중간에 사람 사는 마을이나 횡단도로가 없어 탈출도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등산로는 관리가 잘 되어 있고 갈림길이나 애매한 곳에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 상형문자인 한문으로 산 자가 뚜렷한 암봉들.
한 동안 선라이즈 초원을 가로지르니 그 끝에 엄지손가락처럼 생긴 봉우리가 나타났다. 정말 엄지손가락을 세운 것처럼 꼭 닮았다. 지도를 보니 역시 그 산 이름이 콜롬비아 핑거 봉이었다. 지도에는 우리가 가는 트레일은 그 산의 옆을 돌아 이어졌다. 우리가 소지한 지도는 총 13장의 얇은 플라스틱으로 코팅한 톰 해리슨(Tom Harrison)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지도는 정확했다. 물론 GPS(위성 항법장치)와 나침반을 소지 하였으나 그 복잡한 것을 사용한 적은 없다.

드디어 초원은 끝나고 산길이 시작되었다. 산길은 제법 가팔랐다. 그래도 콜롬비아 손가락 끝까지 오를리는 없을 거라고 자위하며 계속 올랐다. 힘이 들었다. 결국 선라이즈 초원 전체가 보이는 곳까지 오르고 말았는데 손가락 봉 정상이 바로 눈앞에 서있다. 고개 마루에서 열기를 식히며 지도를 보니 제법 높은 고도인데도 고개로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곳도 분수령을 이루어야 고개로 치는 모양인데 우리가 앞으로 넘어야 할 9개의 고개는 얼마나 높을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힘들여 오른 덕분일까. 거기부터는 다시 비교적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손가락 봉 넘어서는 은근한 고원이라는 말이다. 한참을 가다가 잠시 쉬고 있는데 사람을 만났다. 아는 사람이라 반가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반가운 것이다. 백인이었는데 너절해진 옷차림이었다. 우리는 그런 옷차림이 부러웠다. 옷이 망가질수록 목적지가 가까운 법이니까. 그는 우리가 도달하려는 마운틴 휘트니로부터 20일째 걸어오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캐시드럴 고개가 나타나는데 그것 넘어 호숫가에 기막힌 야영지가 있다고 알려준다.

시에라 산맥의 눈이 녹기 시작하는 유월 혹은 칠월 중에 이 트레일은 개방 된다. 그리고 눈이 오면 트레일은 닫힌다. 그러므로 여름 시즌이 되면 세계 각국에서 허가 신청이 폭주한다고 했다. 존 뮤어 트레일은 캘리포니아 등뼈처럼 남북으로 뻗어 있다. 북쪽 깃점인 요세미티에서는 2월 15일 인터넷으로 예약을 받는데 당일 제한 인원이 꽉 찬다는 것이다. 남쪽 깃점인 휘트니 포털에서는 더욱 까다롭다. 미 본토 최고봉 휘트니를 보호하려는 공원 당국의 노력 때문에 입산 허가 받기도 더 까다롭고 인원도 제한적이며 요세미티와는 달리 정상에 오르려면 당일 입산허가도 받아야한다. 우리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남쪽으로 갈수록 더 높은 고개와 산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갑자기 고도를 올리면 고소증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처럼 천천히 고도를 올리면 그런 염려는 없다.

다시 길은 산허리를 감돌며 이어지고 있었는데 계곡 건너편에 한문으로 산(山)자가 뚜렷한 산봉우리가 보인다. 아무리 보아도 영판 상형문자 글씨인 산의 형태였다.

길에서 만났던 백인의 말이 맞았다. 고개를 넘고 나니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캐시드럴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그곳이 오늘 우리가 묵을 자리였다. 이쯤이면 별 몇 개로 품격을 분류하는 도시의 호텔등급 따위는 가소롭기 그지없다. 호수 가에는 작지 않은 초원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고 멋진 바위도 많았다. 존 뮤어는 이곳에 빛의 산맥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물의 산맥이라고 붙이고 싶다. 그만큼 이곳은 옥색 빛깔을 띤 호수 세상이다. 그것뿐일까. 야생화 만발한 초원과 만년설이 남아 있는 4000m이상의 산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어느 곳 하나라도 같은 곳이 있을 리 없었고 시간에 따라 호수 색감도 바뀌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럴 땐 배수로를 파야하는 축축한 땅보다 텐트 세우기에 너럭바위가 낳을 듯싶었다. 먼저 호숫가에 도착한 나는 뒤에 올 일행을 위하여 돌을 주어 평편한 바위 위로 올렸다. 바위엔 텐트 팩을 박을 수 없으니 돌로 지지대를 만들 심산이었다. 한편엔 화덕도 만들어 놓고 나무도 잔뜩 주어다 놓았다.

   
 
한참만에 캠프를 차린 뒤 모닥불 피우며 고즈넉한 호수를 바라보며 먹는 저녁.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은 날카로운 캐시드럴 피크와 그 곁 봉우리 에코 피크를 온전히 담고 있다. 거기에 쳐진 우리 텐트는 잘 그려진 그림 속 하나의 정물처럼 보였다. 커피로 후식까지 곁 들이며 우리는 행복해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피곤했으므로 텐트 플라이를 후드득치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숙면을 취했다.

글=신영철(산악인·소설가) 사진=윤재일(재미교포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