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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문재인-안철수라는 '우상'- 유창선

질고지놀이마당 2016. 1. 17. 05:46

[유창선의 눈]문재인-안철수라는 ‘우상’   / 2016.01.12주간경향 1159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백미는 ‘대심문관’이다. 예수를 지하에 가둔 대심문관은 교회는 자유를 감당할 수 없는 인간에게 빵을 주는 대신 자유를 반납 받았고 그래서 인간들을 온순한 양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인간이라는 이 불행한 존재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이 자유의 선물을 넘겨줄 대상을 어서 빨리 찾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근심거리는 없다.” 인간에게 자유의 믿음을 주었던 예수를 향해 대심문관은 냉소적 얘기를 이어간다.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소수일 뿐이었고,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들은 자유보다는 빵을 원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 채 속박을 찾는 인간의 모습은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도 설명된다. 인간들은 불안을 없애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면서 새로운 속박의 관계 속으로 도피했고, 결국 파시즘의 품 안으로 투항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온 것이 인간의 역사였지만, 반대로 자유를 스스로 헌납해온 것 또한 인간의 역사였다. 우리 역사만 보더라도 영구집권을 위한 3선개헌도, 유신헌법도 국민투표라는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졌다. 어떤 일이 생기든 대통령의 지지율을 더 이상 떨어뜨리지 않는 콘크리트 지지층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나라 팔아먹어도 35%는 지지할 것”이라는 유시민의 비유처럼, 아무리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묻지마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는 한 권력에 대한 여론의 견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야권의 풍경 또한 자유롭지 않다. 더불어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이 사활을 건 경쟁에 들어갔다. 특히 지지층의 대립과 반목은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자기가 지지하는 쪽만이 절대선이고, 반대하는 쪽은 절대악이라는 신념으로 지지층은 뭉쳐 있다. 정치라는 세속의 장에서 선악의 이분법이 얼마나 유용할 수 있겠는가.

문재인 지지층은 그동안 제1야당의 리더로서 그가 드러낸 수많은 문제에는 침묵하면서 ‘대표님 힘내세요!’ 식의 응원만 보내고 있다. 분열의 모든 책임은 당을 깨고 나간 사람들에게 있고, 문재인은 억울한 피해자라는 분노의 정서가 팽배해 있다. 거기에는 무엇을 잘못했던가에 대한 성찰의 시선은 빠져 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다가 문재인이 ‘진보의 이회창’이 되는 것 아니냐는 세간의 우려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만이 대안이라는 신념만으로는, 문재인으로는 안 된다는 현실을 이기기 어렵다.

 


탈당 이후 안철수의 지지율이 호조를 보이면서 그 지지층의 기세도 강해졌다. 기존의 여야 기득권 정치질서를 넘어서겠다는 의지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이들 또한 안철수라는 개인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드러내고 있다. 안철수라는 정치인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할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적 지지는 속박의 굴레가 될 위험이 있다. 끝까지 야권연대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는 목소리는 자폭 공격을 떠올릴 정도로 비이성적으로 들린다. 문재인만 가까이 보이고 박근혜는 멀리 보이는 지지층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과거 양김 대결 시대에도 그러했다. 지지층의 열광은 정치인들의 착시를 낳았고, 지지자들은 정치인들의 노예가 되기를 자초했다. 정치인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은 역사의 도구가 되겠다며 나섰던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을 그리 대하는 게 옳다. 그가 누구든, 언제나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나의 자유를 지키며 내가 정치인들의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천부적 자유를 정치인들에게 잘못 위탁했다가는 다시는 찾지 못한 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다.

< 유창선 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