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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Angkor Wat)

질고지놀이마당 2007. 7. 20. 15:36
 
앙코르와트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포함된 인류의 대표적 유적이다.
 
12세기 중반 크메르족이 건립한 바라문교 사원으로,
외벽이 동서 1.5㎞, 남북 1.3㎞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에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탑과 회랑, 사원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럼에도 '新 세계7대 불가사의' 선정에서 제외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시쳇말로 언 놈이 장난 친 것일까?)
직접 가 보지 못한 필자는 인터넷 검색을 하는동안 앙코르 와트에 대해 확실하게 매료되고 말았다. (꼭 가 봐야겠다는 목표로 설정!)
 
 

 

일단 검색을 통해 구경한 사진 중에서 얼마간의 사진을 다운받아 소개하며

더 관심있는 분은 저 아래 소개글을 참조하여 직접 수고를 하시기 바란다.

 

 

  

  

 

  

 

 

 

 

 

 

 

 

 

 

 

 

  

필자가 검색해 본 블로그 중에서 앙코르 와트에 대해 가장 상세하고 전문적 식견이 있는 곳은 다음 주소였다.

블로그 쥔장은 전문 여행가이자 여행관련 책 발간을 준비하는 분으로 추축된다.(자료 복사 금지)

http://blog.daum.net/haha9508/12251230

 

멋진 사진을 소개하는 사이트는 http://www.flickr.com/ 

검색어 창에 Angkor Wat 를 쳐 넣은다음(복사해다 붙여도 됨) 엔터를 치면 멋진 사진이 뜬다.(사진 검색이니까 영어 몰라도 가능 ㅎㅎㅎ)

화면을 주욱~ 내려보면서, 맨 하단에 페이지를 활용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은 클릭! 그리고 크게보기 활용을...

(아마도 앙코르 와트를 소재로 한 국제 사진전 입선작을 죄다 모아 놓은 것처럼 질릴 정도로 많다.^^*)


다음은 인터넷 백과사전으로 검색한 앙코르 와트에 대한 소개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사전의 문장이란게 좀 그렇기에...^^*)
우선 '앙코르 와트'(Angkor Wat)는 앙코르 라는 지명과 와트라는 신전(탑)이 합쳐진 이름이라 이해하면 되겠다.
 
앙코르는 지금의 시엠림 북쪽 6㎞ 지점에 있으며, 9~15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다.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은 수리아바르만 2세(1113~50경 재위)가 12세기에 지은 앙코르와트와 자야바르만 7세가 1200년경에 지은 앙코르톰이다.
 

앙코르 시는 왕가의 중심지로서, 크메르 왕조는 이곳에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고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을 다스렸다.
890년경 야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잠시 동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시를 제외함)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雲南]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으로 벵골 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통치기간에 지배자들은 자신들과 수도를 찬양하기 위한 일련의 거대한 건축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부를 이용했다.
자야바르만 7세(1181~1215경 재위) 이후 왕국의 권력과 활력은 점차 쇠퇴하여 1431년 타이 군대에게 앙코르를 점령당하여 약탈당한 다음 마침내 버려졌다.
앙코르에서 위대한 건설과 축조는 300년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이 동안 건축과 예술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종교의식은 시바 신과 비슈누 신을 섬기는 힌두교에서 점차 관세음보살신앙이 퍼져나갔다(→ 불교).
 
(중략) 
이런 후대의 사원으로는 자야바르만 5세(968~1001 재위)의 피메아나카스 사원, 우다야디티아바르만 2세(1050~66 재위)의 바푸온 사원 및 불교사원인 바욘 등이 있다.
특히 바욘은 자야바르만 7세 때의 중심사원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 도시를 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건립했는데 이무렵에 도시는 앙코르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략)
13세기말 이 곳을 찾은 중국의 무역사절 주달관(周達觀)의 생생한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는 그때까지도 번영을 누리던 거대한 도시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장엄한 수도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무렵에는 자야바르만 7세의 재위기간 동안 극에 달했던 거대한 규모의 건축열이 확실히 끝나고, 상좌부로 대표되는 새롭고 보다 절제된 종교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 서부에 세워진 타이 왕국의 군대도 이미 크메르의 심장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도시의 폐기라는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밀림으로 뒤덮인 고대 사원의 유해와 한때는 장대했던 저수지와 수로망의 폐허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고대도시가 멸망한 15세기초부터 19세기말까지 400년이 넘는 동안 앙코르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앙코르와트에 모아졌는데, 앙코르와트는 상좌부 승려들에 의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됨으로써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순례지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캄보디아를 찾았던 초기 유럽의 방문객들은 '잃어버린 도시'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나타냈으며, 1863년 프랑스의 식민정부가 세워지자 이 유적 전체는 학문적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재능있고 헌신적인 프랑스의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은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이후에는 정부가 지원하는 프랑스 극동학교의 후원을 받아 이 지역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앙코르의 역사와 생활을 이끈 흥미진진한 종교와 정치체계에 대해 오늘날 알려진 많은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고생스럽고 힘든 복원계획을 실행함으로써 고대의 사원·저수지·운하망을 원래의 장관에 어느 정도 가깝게 복구했다.
 

1960, 1970, 1980년대초에 일어난 캄보디아의 정치적·군사적 소요 기간에 앙코르의 사원들은 전쟁으로 피해를 입고 도굴당하기도 했으나 가장 큰 문제는 방치되었다는 점이었다. 적절한 관리 부족으로 건물들은 급속하고 무성히 자라는 식물과 침식을 유발하는 물, 기타 자연현상으로 황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