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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화도와 석모도-저항과 지조의 땅

질고지놀이마당 2008. 2. 20. 11:04

강화도 여행은 정갈한 마음가짐에서 시작해야 한다. 대부분의 섬여행은 그네들의 훈훈한 인심과 아름다운 풍경에 자신을 맡긴다면

강화도 가는 길은 저항과 은둔, 지조의 정신적인 되새김 없이는 불가능하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요충지였던 이 땅은 고려 몽고의

침략에 맞서 장장 39년간 저항한 섬이다. 조선조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가 강화로 피신을 하여 강화도조약을 맺었으나 병자호란 때 안일한 대처로

결국 섬은 함락되고 말았다. 근대에 들어 미국, 프랑스, 일본의 강화도 침략과 수 많은 약탈로 섬이 피폐화 되었다.

 

석모도 가는 길 일몰이 아름다운 석모도 가는 뱃길에는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르는 풍경이 장관이다.

 

회포선착장에서 갈매기떼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갈매기가 워낙 많아 아예 선착장에는 새우깡을 팔고 있었다.

10여 분 남짓 배를 달리자 어느 새 석모도에 도착하였다. 서해 낙조로 유명하다는 이 섬에 여행자는 해지도록 머물수는 없었다.

아름다움에 푹 빠져 보고 싶었지만 이번 여행의 의미를 저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금강산의 회정대사가 창건하였다는 보문사만 둘러 보고 본 여행지인 강화도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보문사 마애석불좌상 보문사는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과 더불어 3대 관음도량이자 전등사, 정수사와 함께 강화도의 3대 고찰이다.

이 마애불은 보문사 뒤 낙가산 중턱 깍아지른 바위벽에 1928년 조성되었다.

 

아쉽게도 석모도를 뒤로 하고 철종의 용흥궁을 잠시 둘러본 후 곧장 고려궁터로 향했다.

고려왕조가 몽고에 대항하던 1232년부터 1270년까지 39년간 머물렀던 궁터이다.

이 작다면 작은 섬을 행궁지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개경에서 가깝고 바다가 있어 천혜의 요새라는 점에서 행궁지로 정하였을까?

사실 여행 초기 시절 역사유적을 여행하면서 여행자는 세 번 놀란 적이 있다. 강원도 오지로만 생각했던 후고구려 태봉의 도읍지 철원,

남해 변방의 척박한 섬으로만 생각했던 진도, 그리고 여기 강화도까지, 본 도읍지이든 임시 도읍지이든 일국의 정부가 있었다면 모두 이유가 있었다.

이 세 곳 모두 넓은 평야와 기름진 땅을 배경으로 한 생산력이 풍부한 땅이라는 점이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고려궁터의 문창살 저항과 긍지의 터임에도 결국 스러져간 왕조의 운명처럼 문창살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강화성당은 전통적인 한옥양식에 서양의 기독교 건축양식을 수용해 지은 건물이다. 겉으로는 한국의 여느 사찰처럼 보이는데,

성당 내부는 고대 그리스, 로마 건축양식으로 중세 성당건축의 기조를 이룬 바실리카 건축양식이 충실히 반영되어 지어졌다.. 

경복궁을 건축한 목수가 이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문화재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초기 선교사들이 천주교의 토착화에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건물이라 하겠다.

 

강화성당 대한 성공회 초대주교인 코프주교에 의해 1900년에 건립되었다. 대한성공회가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세운 성당이다.

외부공간 구성은 구릉지에 형성된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고 뜰에는 보리수나무 두 그루, 범종과 종각까지 있다.

본채 정면에는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을 달았고 주련까지 기둥마다 걸려 있어 영락없는 사찰양식이다.

 

 

강화도 여행은 바쁘게 진행된다. 볼거리가 많아서 이기도 하지만 한 장소에서 여러가지 상념이 생기기 때문이다.

시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정신에 굳은 의지까지 있어야 하니 더욱 그러하겠다. 신석기시대부터 근, 현대까지 아우를 수 있는,

사전 공부가 철저히 되지 않고서는 강화도를 와도 온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부근리 고인돌 높이 2.6m, 길이 7.1m, 너비5.5m에 무게가 50톤이나 되는 거대한 고인돌이다. 남방식고인돌이 땅에 가까워 정겨운 반면

하늘을 이고 있는 북방식 고인돌은 장쾌하다. 여러 가지 이유야 있겠지만 무덤의 양식에서도 그 지방민의 성격이 반영된다는 생각이 든다.

 

 

 강화도는 '강화학파'를 형성한 학문의 고장이기도 하다.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지만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이규보는 강화에서 74세로 죽었다.

양명학을 천명한 정제두를 필두로 하는 '강화학파'는 그 후예들인 이광사 등의 학맥으로 이어져 일제에 단호히 저항한 이건창, 정인보 등의 거목들을 배출하였다.

 

"자세히 헤아리니 일생동안 벼슬살이에서 마음에 맞는 일보다는 몸만 고달팠네".

조선 말기 갑오개혁 이후 모든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강화에 돌아온 이건창이 남긴 시이다.

고군산도 유배 등 순탄하지 않았던 벼슬살이를 정리한 그는 고향에 돌아와 척양척왜를 강력히 주장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결한 조부 이시원 선생의 뜻을 이어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선비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철저히 실천하는 개인과 가문의 표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건창 선생 생가 생가 바로 뒤의 야산에 조부인 이시원선생의 묘소가 있다.

 

 강화에서 가장 큰 절, 전등사.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전에 이 곳에서 전등사의 개산조가 되었다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삼랑성 동문을 통해 들어가는 이 특이한 입구야 말로 부침많은 전등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원래는 진종사였다고 하는데, 고려 충렬왕비인 정화궁주(옹주)가 옥등을 시주해 전등사로 불렀다고 한다.

혹은 불교 본래의 의미로 진리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전해진다는 의미로 '전등사'라 불렀다고도 한다.

 

전등사 편액 조선 말기 왕실서화가 해강 김규진이 쓴 편액이다. 대나무와 난이 있어 한층 담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강화의 신령스러운 마니산이 서쪽으로 뻗어 내려 형성된 산이 정족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에 있는 산성이 정족산성인데,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이라고도 한다.

전등사를 휘감고 있는 이 산성의 동문이 전등사의 정문인 셈이다.

이곳에서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367명의 포수와 더불어 프랑스군을 섬멸하였다.

성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다.

 

삼랑성 동문 강화도 성의 대부분이 토성인데 비해 이 성은 견고한 석성이다. 현재 전등사 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전등사는 사시사철 참배객과 관광객으로 붐빈다. 번잡한 전등사를 피해 고즈넉하면서도 아담한 정수사를 향했다.

마니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이 작은 사찰은 신라 선덕여왕 8년인 639년에 회정대사가 창건하였다.

회정대사가 마니산의 동쪽인 이곳 지형을 보고 가히 불제자가 삼매정수에 들 수 있다고 여겨 절을 짓고 정수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정수사 대웅보전의 꽃창살 약간은 빛 바랜 사분합문의 화분 속에 모란과 연꽃이 가득 담긴 모습을 담고 있다.

 

숨이 가쁘다. 아직도 보지 못한 유적이 많은데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초지진에 이르자 한 겨울임에도 푸르디 푸른 노송 두 그루가 치열했던 옛 역사의 흔적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자세히 보면 신미양요 당시의 포탄 자국이 성벽 곳곳에 남아 있다.

심지어 소나무에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전투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초지진 효종 7년인 1656년에 구축한 요새로 1679년에 성으로 축조했다고 한다.

이 진지는 병인, 신미양요와 운요호 사건 등 외세의 침입에 맞서 싸워 온 격전지이다.

 

날이 어둡기 시작했다. 1박 2일의 숨가쁜 여정도 여기에서 끝나는 모양이다. 덕진진과 남장포대를 얼핏 둘러보고 용두돈대로 향했다.

강화의 국방유적 중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용두돈대이다.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머리를 쑥 내밀고 있다 하여 용두돈대라 불리운다.

물살이 빠르고 물목이 좁아 천혜의 요새이다. 이 좁은 해협을 손돌목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몽고의 침입으로 고려의 왕이 강화도로 피신할 때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하게 되었다.

손돌이 안전한 곳으로 뱃길을 안내하는데 갑자기 광성보 앞에서 배가 멈추었다. 왕은 손돌이 자신을 헤치려는 줄로 여겨 손돌을 죽이도록 명하였다.

손돌은 죽기 전 배에 있는 바가지를 물에 뛰우면 저절로 뱃길이 트일 것이라 말하고 죽었다.

손돌이 죽고 난 후 몽고군이 따라 오자 왕일행은 손들의 말대로 박을 띄워 무사히 강화로 피신을 할 수 있었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왕은 후회하며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어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10월 20일경에는 매년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므로 사람들은 그 바람을 손돌바람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해는 떨어지고 이내 어두워졌다. 여행자는 찬바람이 부는 돈대에 서서 한참이나 어두운 바다를 응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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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김천령의 바람흔적
글쓴이 : 김천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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