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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퇴직인사 - 57년생들의 비애

질고지놀이마당 2017. 12. 29. 11:44

2017. 12. 29.금. 회사 공유마당에 올린 글이다.


<글 머리에>
덕담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도리임에도 살아온 이력이 별나다 보니까 마지막 인사조차 유난을 떨게 되었다.
30년 노동조합 역사에서 단체협상을 연내타결하지 못하고 다음해로 넘겨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임단협 도중에 지부장 선거를 치르게 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만해도 설마 연말까지 넘기랴 생각했다.

새 지부장은 11월 안에 마무리 짓겠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연말을 코앞에 두고 강요하듯 부쳐진 1차 잠정안은 그러나 부결됐다.
그래도 성탄절 연휴 뒤의 현장 분위기는 연내에 재 잠정합의안 도출하겠구나 기대섞인 예상이었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27일 오후 본협상 재개 5분여 만에 노사대표들이 협상장을 박차고 나왔다는 속보가 sns를 달궜다.
28일 노동조합 집행부의 보도자료를 보면 노사가 서로 '너죽고 나죽자' 며  '동반자살'을 꾀하는 것으로 보인다.
27일 재협상이 결렬에 이른 상황에 대하여 현장에는 서로 상반된 두 개의 주장이 떠돌아 다녔다.


먼저 유포된 sns 소식통은 노조 수석부지부장이 판을 깨는 언행을 했다는 내용이어서 충격과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뒤이어 노동조합에서 배포한 소식을 보면 사측교섭대표인 윤갑한 사장이 판을 깨려고 의도한 것이 팩트라고 강조한다.
어느 주장이 더 사실에 가깝든, 연내타결을 바랐던 조합원들 입장에서는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지금 상황을 보면 솔직히 어느쪽이 참과 거짓인지, 누가 더 진정성을 가지고 전체 공동체의 앞날을 걱정하는지 구분이 안된다.
서로 오기를 갖고 '네가 물러서지 않으면 같이 죽더라도 나는 양보 못한다'고 마주달리는 기차와 같다. 
대다수 조합원들도 마찬가지 였겠지만 연말 정년퇴직을 앞둔 57년생들 입장에서는 더 당혹스럽고 착잡할 따름이다.


30년 역사의 현자노조 대표자(위원장/지부장) 중에서 첫 정년퇴직을 맞는 나 자신도 착잡함을 넘어 참담한 심정이다.
57년생들 대부분은 출근 마지막 날까지 퇴직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어제의 쓸쓸한 퇴근길이 퇴직으로 이어진다.

나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퇴직인사 글을 쓸 기분도 안나고 분위기도 아니어서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따라서 개인적인 인사보다는 현재의 참담한 상황과 대다수 57년생들 정서를 대변하는 내용을 먼저 쓰게 되었다.

다음은 26일 새벽에 하부영 지부장에게 57년생들의 바람과 빠른 타결을 바라는 내용으로 보낸 이메일 중 일부분이다.



57년생들이 느끼는 비애 
올해 정년을 맞는 57년생들은 지금 노사 양측으로부터 부담스런 짐짝 취급 받다가 연말이 됐다는 핑계로 등떠밀림을 당하는 기분입니다.

 "그동안 고마웠노라, 회사와 노조가 상생하는 미래를 부탁한다, 잘 지내라" 공개적으로 떳떳한 인사 남기고,

"수고 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축하인사 받으며 떠나도 아쉬울 판에 왜 우리가 야반도주 하듯이 슬그머니 사라져야 합니까?

노사 대표들은  57년생들이 28일 이후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그 입장을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습니까?

한마디로 기분 더럽고 비참합니다.


이미 회사는 매년 해오던 사업부별 '정년퇴임식'도 취소해서 부서별로 약식으로 진행한다는 것쯤 하 지부장도 들어서 알고 있겠지요.

정년퇴임식 취소시킨 이유가 '노동조합 쟁대위 지침때문에 대체인력을 넣을 수 없으니 정년퇴직자들 퇴임식 시간을 못 빼기 때문'이라는 것 까지도.

실은 그런 이유로 정년퇴직자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인 전직특강(4시간) 조차도 중단한다기에 그것만은 안된다고 본관에 읍소+항의 해서 겨우 진행했어요.

정년퇴임식이야 늦추든 안하든 그게 뭐 대수냐 싶었고, 정년연장 협상중에 퇴임식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라 생각돼서 상관 안했지만

노사 지도부 모두 30~40년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맞는 늙은 노동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끝이라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야기가 오락가락 많이 길어졌는데 마무리 겸해서 정말 사심없이 하 지부장과 노사 모두를 위해서 하는 제언이기도 합니다.

28일 이전에 재 합의를 이끌어 낼 수만 있다면 1월 3~4일쯤 재투표가 가능하겠지요.(57년생도 투표권 부여, 재투표 부치면 통과 됩니다.)

4~5일에 조인식과 더불어 정년퇴직 인사명령을 냄과 동시에 57년생들을 소집하세요.

문화회관이든 연수원 강당이든 수용 가능한 공간에 오라고 해서 단체협약 보고회 겸 약식 정년퇴임식을 하는 겁니다.


자청해서 매를 맞겠다는 각오로 솔직하게 과정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용기있는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선배님들 정말 죄송합니다. 약속을 지키려 최선을 다했지만 제 힘이 여기까지 밖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회사측도 함께 참석해서 퇴직자들에게 진정성을 담은 회사의 약속을 설명하면 훨씬 좋겠지요.

(문화회관 지하1층, 혹은 숙소식당 2층에서 다과회 정도를 준비하면...)

(중략~)

욕 먹을 줄 뻔히 알면서 판을 깔아주고, 노사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거지요.

정말이지 지금 이대로 28일 이후 각자 뿔뿔히 흩어지고 나면 평생 한으로 남아 두고두고 회사 원망하게 될겁니다.

내 능력이야 보잘 것 없으나 힘 닿는데까지 좋은 그림을 만들도록 견마지로를 다 하겠고 어느만큼 도와 줄 자신감도 있습니다.

진심으로 현대자동차 노사의 상생과 공동발전을 위한 그림을 만들어주고 떠나고 싶습니다.

하 지부장이 정년연장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받을 원망과 질책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런 모습을 통해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것입니다.


<맺는 말씀>
이제 회사를 떠나지만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
내 인생의 황금기 38년을 보낸 현대자동차 생활과 그 과정에서 함께 했던 분들을 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79년 입사하여 대형조립부 3톤섀시라인에서 조립공으로 시작한 이래
81년 시험연구부로 전환배치가 되어 연구소 소속으로 가장 긴 시간을 보냈고,
북구청장 재직기간 무급휴직 4년 이후 2006년 교육부서에서 11년을 보내고 정년퇴직을 맞습니다.

마지막 3년간 노사합의로 운영하는 정년퇴직프로그램 실무자로 일한 기간은 저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저에게도 소중한 시간이었고, 선후배 동료들에게 도움되는 일을 한다는 보람과 자부심을 갖고 마지막 소임이라는 각오로 즐겁게 일했습니다.
하지만 매우 좋은 취지의 퇴직지원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경영진의 인식과 노조의 관심도, 당사자들의 배타적 모습은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여 현재까지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에 대해서는 따로 쓴 글이 있는데 이후라도 따로 공유할 방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퇴직에 앞서 노사대표 모두와 구성원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주로 쓴소리)를 주제별로 준비했었습니다만 
임단협 진행과 겹치는 바람에 도중에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떠난 뒤에라도 이것만은 꼭 알려야겠다 싶은 내용은 제 개인 블로그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저를 아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고마웠고, 때때로 실망드린점 죄송하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은 벼랑끝 대치를 하고 있습니다만 새해 벽두에는 원만한 타협점을 찾고 상생의 길을 모색하길 간곡히 부탁합니다.
임직원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