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정치/질고지칼럼

5. 비 내리는 매봉재

질고지놀이마당 2008. 6. 19. 14:40


  관리자 (2004-07-08 10:46:25, Hit : 262, Vote : 95
 비 내리는 매봉재를 다녀와서


2004. 2. 22(일) 비

주말에 내리는 봄비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반가운 빗님 덕분에 이번 주말 산불 걱정은 '뚝'이다.
지난 주말 아침에 내렸던 비가 조금만 더 내렸어도 큰 불로 이어지지 않았을텐데….
비 한 방울도 인력으로 대신하려면 얼마나 큰 어려움인지 불끄면서 절감했다.
평소 고마움을 모르던 빗방울 하나도 얼마나 큰 자연의 축복인지.
그러나 넘치면 또 얼마나 큰 재앙인가!

일기 관계로 비행기가 뜨지 못해 어제와 오늘 제주도 출장이 취소되었다.
덕분에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으나 비가 내리니 마땅히 할 일이 없다.
큰 비가 아니어서 아내를 설득해 산행을 나섰다.
내심은 불에 타버린 현장이 가슴에 맴돌고 있어서다.
아내도 그런 마음을 아는지 선뜻 따라 나선다.

불이 난지 만 일주일.
비가 내리는 탓에 산을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초소에는 산불 감시원들도 보이지 않는다.
고마운 단비 덕택에 편안한 하루의 안식을 취하는 걸까.
아니 하루 일당에 생계를 걸고있는 감시원에게는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리라.
등산로 초입 발화 지점 주변을 살펴보니 잿더미 속에서 파릇한 새싹이 움트고 있다.
땅 속에선 더 많은 생명체들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


산길에 들어서자 아직도 화기(火氣)가 물씬 풍겨 온다.
타다만 나뭇가지들은 시꺼먼 부지깽이를 세워놓은 것 같다.
태풍 '매미'에 쓰러진 채 불길에 타버린 나뭇등걸이 비를 맞으니 더 처연하게 보인다.
태풍(颱風)과 화마(火魔)가 연이어 휩쓸고 갔으니 남은 것은 폐허 그 자체다.
그 날의 참상은 그대로인데 등산로만 변하고 있었다.
적은 양의 비가 내렸을 뿐인데도 물길을 견디지 못해 맨살이 파여 나가는 모습으로.

자손이 돌보는 산소는 볏집을 잘게 썬 여물이 뿌려져 있다.
새까맣게 타버린 곳에서 돋보이는 쌍 봉분이 여인의 젖가슴을 연상케 한다.
불탄 산소에 소여물을 뿌리는 것은 혼백을 불러오기 위한 풍습이었다.
이름 모를 한 무리 작은 새 떼가 바쁘게 날아다닌다.
저 녀석들도 갑자기 변한 환경에 황망히 새 보금자리를 찾나 보다.
산불을 피해 달아나던 노루가 몇 마리 있었는데 안전하게 대피했는지 걱정스럽다.
인간들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혼백을 모시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데...

잿더미로 변한 현장을 보고 '눈물이 났다'는 고백은 결코 지어낸 말이 아니다.
불난 곳의 참상을 본 사람들마다 안타까움과 분노를 표시한다.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들도 질책과 제언 속에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이러한 마음들이 모인다면 다시 살리는 일도 어렵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