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진(記)/국내여행

개성시범관광 자료사진 (1)/20050902

질고지놀이마당 2014. 10. 17. 06:00

2005. 9. 2 시범관광단 일원으로 4차에 다녀 옴

 

남과북이 한창 화해모드였을 때, 당시 기대로는 개성관광도 금강산관광처럼 활짝 열리고 머지않아 평양관광도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는 분위기였다.

개성관광을 일반에게 시행하기 앞서 한정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범관광 기회에 당일치기로, 벼락치듯 다녀온 자료사진이다.

그런데 북한 여행사진을 블로그에 공개하면서 국외여행방과 국내여행 방 어디로 해야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

비록 아직은 금단의 땅이지만 엄연히 우리의 영토요, 언젠가는 통일이 돼서 자유롭게 오고가야 할 내나라 내땅이라는 생각에 국내여행으로 분류했다.

 

안타깝게도 남북관계는 정치적으로 워낙 민감하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당시 네차롄가의 시범관광 이후 굳게 닫혀버린 뒤 언제 열릴지 기약이 없다.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이 있었고, 천안함, 연평도 포격 등 남북관계가 경색될 사건들이 있었고, 국민의 정부 및 참여정부와 달리 보수적인 정권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시범관광은 머슴골 회원들과 함께 동행을 했었다.

똑딱이 디카로 찍은 사진이라 상태가 별로였지만 10년 가까이 된 사진을 보정하고 다듬어서 두 꼭지로 나누어 소개한다.

 

이른새벽, 경복궁 근처에서 출발준비, 시범 광객을 실어나를 관광버스 기사들도 긴장된 모습으로 주의사항을 듣고 있다.

 

 

출입국 수속을 기다리면서

북한이긴 하지만 출입국수속을 해야 하니까 외국에 나가는 절차와 똑같다.

 

굳게 닫힌 비무장지대 철문을 지나 북으로~

 

이 버스들은 개성관광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 출고하여 단장을 했었는데 벌써 만 9년이 넘었으니 다른 용도로 사용되다가 용도폐기 될 차령이 되었겠다.

 

사진촬영 금지구역이 많아서 북한 입국수속장은 사진이 없다.

대신 입국수속을 마치고 문을 나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상품매장이다.

조립식 간이천막을 설치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북한여성들이 남조선 관광객을 상대로 북조선의 술과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첫 방문지는 고려박물관, 그러고 보니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던 고도다.

고려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홀대받는 존재였던(?) 그대 이름은 남자

아래 도표에 보면 가장 값이 덜나가는 존재는 남자노비였다.~ㅠㅠ

 

우물과 고장난 수동 물펌프

 

 

 

북한쪽 안내원이 아직 생소했을 디지털카메라로 남쪽 관광객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불과 10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이때만 해도 지금처럼 휴대폰카메라가 대중화 되기 전이다.

 

고려박물관 경내로 옮겨다 놓은(?) 국보급 문화재

 

 

 

 

 

 

북조선에서 보는 남조선 국화인 무궁화를 보는 감회

이때까지 나는 북한은 남한의 국화인 무궁화는 아예 씨를 말렸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ㅎㅎ

분단된 국가에서 북한체제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적인 세뇌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남조선 관광객이 들리는 곳마다 빠지지 않고 자리잡은 것이 이와같은 간이 기념품판매대였다.

예로부터 인삼하면 금산 풍기 개성 세곳이었던만큼 인삼제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도시는 온통 회색빛, 다른 색깔로 단장된 건물은 하나도 못 본 것 같다.

남쪽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버스를 안내하는 선도차량과 북측 관계자들이 타고 따라다니는 차량은 남쪽에서 생산한 RV차량들이었다.

현대 테라칸, 갤로퍼, 기아 쏘렌토 등...

 

 

창밖의 풍경을 찍지 말라고 했지만 눈치껏 몇 장을 담았다.

관광버스가 가는 모든 길목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인민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측 군인들 모습이 하나같이 앳띠고 왜소해 보였다.

 

선죽교

충절의 표상인 포은 정몽주가 조선개국에 협조하지 않자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됐다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역사의 현장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릴 것을 예측하고는 빠른 걸음을 이용하여 다른 관광객들보다 한발 먼저 도착해서 비어있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다.

 

 

잠시 후부터는 이러한 모습~^^*

 

선죽교 아래 흐르는 물이 왜이리 탁한거여?

선죽교 석재 교각을 보수한 흔적을 보니 시멘트로 보완하는 등 문화재 관리도 북한은 우리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것 같았다.

 

 

 

조선왕조는 개국초기에 협조를 거부하는 정몽주 선생을 피살했지만 오래지 않아 정치적으로 복권을 시키고 그를 만고의 충신으로 예우했다.

조선의 왕들이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인 '표충비'를 두개나 세웠고, 아래 기와지붕 건물은 그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이다.

어느 왕이라고 설명을 들었었는데 세월이 오래돼서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ㅠㅠ

 

 

 

 

개성시내의 한 단면, 한결같은 회색빛 건물에 몇 개의 간판을 통해서 북한의 사회상을 유추해석 하게 된다.

북한 주민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일체 없었고, 거리에 다니는 주민도 별로 보이지 않도록 이동 동선을 조치한 것일까?

 

 

정몽주 선생의 영정을 모신 서원방문

 

 

 

 

담장 너머로 살짝 엿본 개성시내의 단면

 

사회주의체제에 반입된 자본주의의 상징.

박물관 서원에도 어김없이 기념품을 파는 간이 매장을 설치하고 여성판매원들은 매상을 높이기 위해서 안간힘

 

다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