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산행기/영남알프스

영축산(영취산) 심설산행기

질고지놀이마당 2007. 5. 15. 16:39

 2월 7일(화) 흐리고 눈

* 산행시작  비로암 부근(13:20)~백운암~함박재(15:10)~함박등~영축산 정상(15:40)
* 하산시작 (16:05)~ 비로암 하산 완료 17:15

어제는 새벽부터 눈이 내린 탓에 각 구청마다 제설작업으로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나 역시 애가 쓰여 관내를 돌아보며 제설작업도 함께 했다.

작년 겨울 몇 번에 걸친 폭설로 혼쭐이 났던 터라 이번 눈에 대한 제설작업은 아주 효율적으로 이루어 졌다.
무엇보다 눈이 내린 양도 많지 않았고, 제설장비며 경험이 축적되었기에 그랬다.
주민들의 참여도 작년보다 나아져서 민관 협력도 잘 됐다.






오늘도 아침에는 눈발이 날렸지만 대수롭지 않아서 눈치 보지 않고 산으로 향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갈까?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떠나면 막상 갈 곳이 마땅치 않다.

눈 쌓인 ‘영남 알프스’ 어디를 가도 다 좋을텐데 선뜻 정하지 못함은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서다.
가는 내내 생각하다 절도 좋고 산도 좋은 통도사로 방향을 정했다.

항소심 선고 앞날인 2월 2일 전남 강진을 다녀오며 마음이 끌려 통도사를 들렀을 때 눈 내린 정경이면 참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마침 눈이 내렸으니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통도사를 비롯한 구릉지대에 있는 암자의 지붕에는 벌써 눈이 녹고 있었다.
서운암에서 영축산 능선을 배경으로 눈 쌓인 장독 사진을 찍는데 날씨가 흐려 영축산 정상에서 시살등으로 이어지는 장엄한 암릉경관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자꾸 지체되고 등산 기점을 어디로 할 것인지 고민하다 가장 단거리 코스에 속하는 극락암으로 정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암자까지 걸어서 오를텐데 울산에서의 당내 행사 시간에 늦어서는 안되겠기에 차를 몰고 올라가는 도중에 한 떼의 참배객이 걸어서 내려오기에 그냥 오르기 뭣해서 길옆 공터를 찾아 주차를 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는 심정으로 컵라면에 물을 붓고 막 먹으려는 찰나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크!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다.
몸이 불편하신 노 보살님이 산 아래 주차장까지 걷기가 힘들다고 좀 태워달라는 부탁이었다.
순간의 작은 갈등... 하지만 선택은 빨랐다.
라면이 퍼진들 뭐 대수랴, 흔쾌히 차를 돌려 태워다 드리고나니 마음이 편하다.

날씨는 잔뜩 찌푸린데 극락암에서 산행기점을 찾지 못해서 다시 비로암까지 올라갔다 경관에 반해 사진 찍다보니 산행출발이 자꾸만 늦어진다.

비로암으로 오르는 왼쪽 옆으로 백운암 가는 등산로 표지가 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는 이윽고 출발이다. (13:20)



백운암 오르는 임도는 발자국이 어지럽다.
눈 내린 하루 사이에 벌써 숱한 등산객이 다녀갔다는 증거다.
산을 다녀 본 사람들은 대개 남이 안간 길,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싶어 한다.
나 역시 눈이 내린 후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가고 싶었는데 너무 많은 발자국이 있어서 좀 실망이다.

혹 지름길이 있을 법하여 두리번 거리니까 소나무 숲 사이로 딱 한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이 찍혀있다.
아이젠 및 스틱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 참배객이 아닌 등산객일 터.
망설이지 않고 그 발자국을 따라 오르니 좀체 본길과 만나지 않는 험로다.
초행길이어서 이 길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되돌아 갈 수도 없고 방향으로 보아 맞는 것 같다.

이제는 달리 선택도 없는데 눈이 발목까지 빠지니까 앞서간 발자국이 아니면 두 배는 힘들 터이다.
러셀(눈 쌓인 등산로에 첫 발자국을 내는 것을 말함)이 안 된 등산로를 걷기는 매우 힘들기 때문에 단체로 갈 경우 일행 중에서 체력이 좋은 사람 몇 명이 선두에서 길을 내며 걷다가 교대를 하곤 한다.



한 20분 걸었을까?
땀이 흐르기 시작할 즈음 잠시 쉬어갈 겸 아이젠과 스팻츠를 착용하니 한결 편하다.
등산로 초입부터 완만한 길 얼마간은 맨 등산화로 올랐는데 경사도가 높아지면서 두발 디디면 한 발 미끄러지는 상황이어서 더 버틸 수가 없다.  

산을 오를수록 날씨가 점점 나빠져서 마음이 조급하다.
이윽고 시살등에서 정상으로 가는 능선 갈림길(함박재?)에 올라선 시간이 15시 10분, 산행 출발부터 1시간 50분 걸렸다.
눈길이어서 생각보다 산행속도가 느리다.

능선길은 편하긴 하지만 바람이 세차고 안개구름이 자욱하게 밀려왔다 밀려가는 등 변화무쌍한 가운데  무지하게 춥다.
손 시려움을 참고 사진 몇 컷 찍고는 다시 속도를 내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람소리가 반갑다.

단체 산행을 왔다는데 본 대열 일행에서 뚝 떨어진 후미 그룹이었다.
전남 순천에서 왔다니 제법 산을 다닌 산악회 멤버일 터.
나한테 길을 묻고 동행을 청하는데 시간에 쫓기는 내 일정상 그들을 이끌고 갈 형편이 안된다.

빨리 가서 앞에 일행에게 소식 전해 주는 것이 돕는 길이라고 양해를 구한다음 더욱 속도를 내서 뛰다시피 정상에 올랐더니 다 내려가고 마침 세명의 일행이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는 더 악화되어서 불과 지척인 신불산 정상과 정상아래 억새 평원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눈발이 흩날리니 길손의 몸과 마음은 더 바쁘기 그지없다.



길가에 선채로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상태의 증거사진 한 장 부탁하고는 이내 하산 길...
그런데 악천후로 인해 내려오는 길을 잘못 찾아서 오던 길을 되짚어 오다가 왼쪽으로 난 발자국이 두엇 있어 그 코스를 잡았더니 탈출로 비슷한 험로다.

이정표도 없고 시그널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급경사 내리막 길을 구르듯 내려오는데 위안이 있다면 이번에도 앞서 간 발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다는 점이다.

눈산을 혼자 오르고 내려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앞서 발자국을 남기고 간 산꾼이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는지...
인생도 그렇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앞서 가려면 그만큼 힘들고 위험부담을 안아야 한다.
그 대신 성취감이나 보람도 큰 법.
반대로 남들이 가는 길, 시류의 흐름에 따라 가면 편하고 위험부담도 없지만 자기 성취감은 적다.

이름하여 선각자 혹은 선구자의 길은 그래서 고독하고 고통이 따르는 법이리라.
평범한 등산길에서 다시 깨닫는 진리다.

내려오는 길은 한시간 남짓.
당 행사에 늦지 않을 정도로 여유있는 시간이었다.
불과 4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전혀 딴 세상을 다녀오는 사이 내 마음은 분함도 노여움도 다 녹아내리고 평안으로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