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산행기/영남알프스

가지산 산행기

질고지놀이마당 2007. 5. 15. 17:01

2월 10일(금) 맑음 가지산

 

석남터널 입구 휴게소 건너 출발 - 입석대 능선 - 능동산 갈림길 - 석남터널 위 갈림길 - 가지산 정상- 쌀바위 - 상운산 - 귀바위 - 운문사 하산 갈림길 - 쌍두봉 갈림길 헬기장 - 배너미재 - 운문사 주차장

혼자 산행을 가면 불편한 것 중의 하나가 교통편이다.
산행출발점으로 돌아오려면 산행 코스에 제약을 많이 받고
다니고 싶은 길을 택하면 하산점이 달라 차를 가지러 가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틀간의 산행에서도 그러한 불편이 컸기에 오늘은 마침 아내와 아내 지인이 밀양에 약 지으러 간다기에 가는 차편에 동승해서 갔다가 돌아오는 길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오늘 산행 목적지는 고민할 여지없이 가지산이다.


암릉에서 배내고개 방향으로 바라 본 설경

석남터널 못 미쳐 오른쪽 휴게소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 능선으로 오르는 등산로 들머리를 알리는 시그널이 있다. 이 길은 등산카페 '세월'의 안내산행을 따라 왔던 터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길을 건너 등산로를 보니 오호라! 아무도 올라간 흔적이 없다.

이제 비로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내 발자국을 남기며 오를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기쁨과 걱정이 교차한다.
바로 눈길 오르막이라 미리 아이젠 스팻츠를 착용하고 출발(10 : 50)


암릉에서 본 가지산 정상

그런데 출발부터 악전고투다.
러셀이 안 된 등산로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경험하게 된 것이다.
눈 때문에 길을 찾느라 우왕좌왕하게 되고, 등산로에만 유독 눈이 많이 쌓여있는 경우가 많다.
장애물이 없고 옴팍하게 패인 등산로에 바람이 눈을 몰아 놓은 탓에 허리까지 빠지기 일쑤이기 때문에 길을 두고 우회해야 한다.

게다가 눈 표면은 살짝 얼어 있고 속에는 푹 빠지기 때문에 걸음을 디딘 다음 발을 빼 내기가 쉽지 않다.


암릉 구간의 입석

석남터널 앞 뒤로 많이 알려지고 오르기 편한 등산로가 있음에도 굳이 멀고 험한 이 길을 택한 이유는 짧은 암릉구간의 전망과 경관이 아주 좋아서다.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힘들게 오른 대가는 암릉에 올라서자 이내 멋진 경관으로 보상된다.
이곳에서 조망하는 가지산 주봉 좌우 능선과 배내골 설경, 고헌산 조망은 혼자보기 아까울 정도다.
또한, 암릉구간에 있는 입석과 암벽도 일품이다.


입석 암릉에서 본 고헌산 전경

마음껏 사진을 찍다보니 날씨가 심상찮다.
갑자기 냉랭한 바람이 불어 닥치며 구름이 몰려든다.
너무 지체했다 싶어서 서둘러 암릉  길을 올라 능동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갈림길 돌탑에 이른 시각이 12시15분, 여기에서 천왕산에 이르는 능선과 가지산 주봉에 이르는 조망도 일품이다.


돌탑 갈림길에서 본 능동산 - 사자봉 이르는 능선

주 능선길은 러셀이 잘 돼있어 걸음 속도를 내기 충분하다.
석남터널 위 갈림길에 닿은 시간이 12시 45분.
이제 비로소 가지산 산행 시작인 셈인데 휴게소에서 출발하여 약 두시간을 소비한 셈이다.
이제부터 속도를 내야 하는데 슬슬 허기가 진다.

산행을 하면서 배운 상식은 지치기 전에 휴식을 취하고, 허기지기 전에 간식을 먹어 두라는 것인데 알면서도 시간에 쫓기다 보면 실천이 잘 안된다.
그렇다고 걸으면서 무엇을 먹는 것은 숨이 차서 더 힘들다.
다소 평평한 길을 걷는 동안에 고단백 간식을 섭취하고 오르막에서 한눈팔지 않고 힘을 냈다.


가지산 오르는 길에 뒤 돌아 본 능동 - 배내 - 간월 - 신불산 방향 산군

석남터널 이후 가지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벌써 수많은 등산객이 다녀갔는지 등산화에 밟힌 눈이 흙과 섞여서 눈길 산행 기분이 나지 않는다.
간간이 마주치는 등산객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데 이곳에서도 얼굴을 알아보는 경우가 제법 많아서 조금은 불편하다.

어떤 일행은 "아저씨, 북구청장 많이 닮았다"고 해서 웃음으로 대신하기도...

호박소로 내려가는 쇠점골 계곡, 건너편이 천황산과 재약산

어떤 분들은 산에서 한 두번 만났다며 억수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에 사진 부탁을 하기도 했다.
휴식 대신 전망 좋은 곳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여 14시에 정상에 도착했다.
석남터널 갈림길에서 부터 1시간 15분 걸렸다.


가지산 정상에서 눈꽃 사이로 본 신불산 방향, 중봉 너머 능동산 - 간월 - 신불산

가지산 경관은 신불산 못지않은데 날씨가 어제만 못하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손이 어는 듯 하고 정상에서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다.
설상가상 하얀 설경사진을 찍는데 구름으로 인한 검은 그림자가 못내 거슬린다.
날씨가 더 나빠지기 전에 부지런히 경관사진을 찍고는 늦은 점심.


자연이 만든 눈꽃

바위를 바람막이 삼아 웅크리고 앉아 김밥을 먹자니 어제 신불산 정상에서 궁상스럽다고 생각했던 산꾼들의 모습을 내가 따라하고 있다.
너무 추워서 컵라면에 물을 부었는데 금새 식어 버린다.
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쌀바위 방향으로 길을 나서는데 북사면에는 얼음꽃이 장관이다.
다시 카메라를 꺼내서 놓치고 싶지 않은 경관을 담다보니 어느새 15시가 넘었다.
정상에서 1시간이나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정상에서 바라 본 쌀바위 너머 상운산과 오른쪽 고헌산

빨리 많이 걷고 싶은 욕심과 좋은 장면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사진 욕심이 서로 충돌한다.
이후 달리듯 가다가 사진찍기 위해 서다가를 반복하면서 쌀바위에 15시 45분 도착.
여기서 쌀바위 전경 사진과 걸어 온 능선길을 카메라에 담고 다시 출발.


쌀바위


쌀바위에서 본 설경. 능동산에서 가지산으로 이어지는 호랑이 등 닮은 능선

이때부터 머리 속은 어디로 내려갈까 계산하기 바쁘다.
운문재로 가면 편하지만 너무 빠르고, 운문사로 가려니 초행길인데다 러셀이 됐을지도 걱정이다.
결정을 못하고 임도를 따라 걷다가 상운산과 귀바위 길로 올라섰다.
그동안 여러차례 가지산을 오르면서도 항상 지나쳐 간 코스여서 이참에 들러가자 싶었다.
그리고 운문사 방향으로 가려면 그 쪽으로 가야 갈림길이 있을 것으로 어림짐작할 따름이다.
산행에 필수인 등산지도 한장 챙기지 않고 올라 온 용감함인지 무모함인지...
예상한 대로 상운산 정상 못미처에 운문사로 가는 길도 있고, 앞서 간 발자국도 있었다.


상운산 정상. 아래는 운문사로 내려가는 계곡, 멀리는 문복산

상운산(1114m)에서의 조망도 좋은 편이다.(16:40)
가지산 및 멀리 신불산도 아스라히 조망되고, 가지산에서 서쪽을 뻗어 내린 운문산, 억산 능선도 오후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잡힌다.
고헌산과 그 너머 백운산, 그리고 문복산이 가까운데 해질녁이 되어서 촬영 조건은 좋지 않다.


상운산 능선에 쌓인 눈

운문사 방향으로 길을 정하자 이제 마음이 급하다.
그렇지만 귀바위까지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기에 배낭을 내려놓고 카메라만 가지고 뛰듯이 귀바위까지 다녀왔다.
그렇게 해서 상원산 아래 운문사로 내려가는 갈림길 출발이 17시 10분.
구름 사이를 숨바꼭질 하는 해는 사선의 햇살을 그리며 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운문사까지 얼마나 걸릴지 시간을 가늠할 길 없으니 무작정 빨리 갈 따름이다.
내리막길을 달리듯 한 30분쯤 내려갔을까, 낮은 봉우리를 몇 개 지나고 헬기장 갈림길이 나타난다.


노을에 물든 운문산

오른쪽으로는 쌍두봉으로 내려가고 왼쪽길이 운문사로 가는 길이다.
구름에 가려있던 해가 마지막 빛을 발하며 하루의 작별을 고하기 직전인데 더 내려갔다간 일몰장면을 못 볼 것 같다.
갈 길이 까마득해서 조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산에서 보는 일몰과 저녁노을을 담고 싶은 욕심에 걸음을 멈추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심술궂은 구름이 끝내 마지막 지는 태양의 모습을 가려버린다.
구름만 아니라면 멋진 일몰 장면을 볼 수 있겠는데 참으로 애석하다.
대신 운문산과 억산을 배경으로 노을빛을 담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17:45)


쌍두봉 갈림길 헬기장에서 본 가지산

다시 급한 하산 길을 서두르는데 아마 앞서 간 산꾼의 발자국이 없었다면 십중팔구 큰 낭패를 겪었을 것이다.
산 사나이들은 대개 누구도 가지 않은 새 길을 먼저 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그리고 간 길을 되돌아오기 싫어하고, 가보지 않은 길을 선호한다.
그러한 결과(?)로 나는 이름모를 누군가의 덕을 톡톡히 본 하루였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야 하지 싶어서 내리막길을 달리듯 내려가길 또 30여분.
배너미재(?)라 부르는, 눈에 익은 낮으막한 고개로 내려서자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런데 여기서 순간의 선택이 한 시간을 좌우하고 말았다.
불빛이 비치는 삼계리 방향으로 가면 불과 20분이면 될 것을, 나는 같은 거리일 거라고 추측하고 애초 목적지로 삼았던 운문사 길을 택했다.

산골의 어둠은 빨리 내리는 법,
이미 어둠은 짙은데 후래쉬도 준비하지 않은 무모함을 탓해본 들 무엇하리.
다행히 달빛이 밝고 눈이 쌓인 탓에 빛이 반사되어 길을 식별하기는 어렵지 않다.

얼마간을 걸어서 제법 평평한 임도로 나오기까지만도 20분 이상 걸리는데 반대로 삼계리로 나갔으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가지산 오르는 길 중봉 근처에서 등산객을 만나 기념촬영

겨울에 혼자 초행길 야간산행을 택한 것 자체가 무모함을 골라 했으면서 그만한 일로 후회한 들 뭣하랴.
길 잃을 염려 없고 다친 곳 없으니 그만하면 산신령의 보살핌이 있음직하지 않은가?

계곡까지 내려섰는데 얼마를 걸어도 나타나야 할 운문사는 보이지 않고, 적막강산에 물소리 바람소리에 달빛만 고요하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이 역시 즐겨볼만한 풍광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나의 과욕과 함께 이번에는 산골짜기의 전화 불통으로 인해 걱정을 끼치고 말았다.
그러고도 얼마간을 더 걸어서 나타난 깜박거리는 암자의 불빛, 그 반가움이여.
나를 기다리는 어머님의 마음처럼, 고향집의 아늑한 불빛처럼 사리암의 불빛이 흔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날아갈 듯 세찬 바람을 맞으며 가지산 정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