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정치/질고지칼럼

32. 설 연휴, 가사노동 동참記

질고지놀이마당 2008. 7. 2. 14:43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 모음입니다.

 


  이상범 (2005-04-07 14:22:56, Hit : 269, Vote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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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연휴, 가사 노동 동참記 (빨래는 힘들어...)


단체장의 사생활은 없다?

세상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평소 잘 하다가도 자리를 비우면 꼭 무슨 일이 생기고, 막상 준비를 하고 있으면 아무 일이 없는 경우가 많다.
지난 1월 16일 내렸던 폭설로 인한 교통대란은 46년만의 기록이 말해주듯이 평소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울산지역의 특성상 관공서에서 제설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대비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고가의 제설장비를 사 놓았다가 몇 년간 쓸 기회가 없어서 고철이 된다면 역시 문책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뒤 부랴부랴 각 구청별로 제설장비를 구입했는데 앞으로 이 장비들의 쓰임새가 얼마나 있을지는 전적으로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

그 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사적인 일로 울산을 떠나 있던 구청장 몇 명은 제설작업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언론으로부터 호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폭설이 내린다는 예보는 없었으므로 단체장이 일요일에 다른 지역에 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고, 따라서 부재중이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까닭은 없는데도 말이다.
단체장은 일요일이나 공휴일조차도 사생활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구청장이 되고 보니 명절에 지역을 비운다는 것이 어딘가 책임을 방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임기동안은 설과 추석을 울산에서 보내기로 결심하고 형제들과 조상님께도 그리 告하고 지켜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비상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명절 연휴는 넉넉한 자유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대신, 아내의 통제권에 들어가는 시간인 까닭에 이번 설 연휴에는 지엄한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가사노동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었다.


연휴 첫날

설 연휴동안 커텐 빨래를 하자는 아내의 명이 떨어졌다.
그동안 엄두가 나질 않아 못 들은 척 하거나 적당한 핑계를 대고 미뤄왔던 것인데 연휴기간에 마땅히 갈 곳도, 공식 일정도 없으니 딱 걸린 셈이다.
마음 한편엔 아내 혼자서 커텐 빨래를 하기에는 벅찰 것이므로 이참에 못 이기는 척 가사노동을 거들어 줌으로써 점수를 따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고 보니 떼어내는 일부터가 보통이 아니다.
거실과 방 4칸, 주방 칸막이까지 합치면 2조씩 6세트인데다가 두 겹으로 되어 있어서 한 곳에 모으니까 거실이 그득하게 느껴진다.
아내 혼자 이 많은 빨래를 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에 아내를 돕는 것도 좋은 일이라는 기특한 마음은 잠시 뿐, 아무래도 잘못 걸렸다는 생각뿐이다.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천정을 보고 하는 작업이라 벌써 목도 아프고 팔다리가 뻐근하다.
"이거 세탁소에 맡겨야 하는 것 아니야? 그래야 세탁소도 먹고 살지"
"아니, 그걸 시방 말이라고 해요? 그러면 편한 줄 누군 모를까봐!"
돌아오는 것은 오뉴월 풀쐐기 같은 핀잔이다.
연달아 터지는 마무리 펀치.
"왜 아주 새 것으로 바꾸자고 하시지!"
본전도 찾지 못할 말실수를 한 셈, 이럴 땐 그저 침묵이 약이다.

어쩔거나 기왕 시작한 일,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서로 심신에 좋을 터.
욕조에 물을 그득 채우고 세재를 풀어서 거품을 낸 다음 본격적으로 빨래를 치대는데 얼마 못가서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해도 해도 빨래는 줄어들지 않고, 물 젖은 커텐이 얼마나 무거운지 어깨도 아프고 손목이 시큰거려서 나중엔 발로 밟다가 콩콩 구르다... 구청장 체면 벗어던졌다.
하지만 꾀 안 부리고 열심히 하는데도 깐깐한 감독 눈에는 차지 않는가 보다.
몇 번의 불합격 판정 끝에 겨우 '때 빼기' 작업을 마치고, 헹굼 작업은 사이좋게 합동으로 마쳤다.
이제는 팔 다리 뿐만 아니라 허리조차 뻑적지근하다.

빨래를 펼쳐서 널 공간이 없으므로 그냥 횃대에 걸친 다음 어느 정도 물 빠짐이 되면 탈수작업은 혼자 하겠단다.  
커텐을 다는 일은 마르고 난 다음에 걱정할 터.
이제는 자유시간이다 싶어서 테니스장에 간다니까 조잘거리는 아내의 힐난이 뒤통수에 박힌다.
이런 젠장, 도와줘도 마누라는 저래서 탈이라니까.
"팔다리 허리 아프다는 것 꾀병이네, 아프다는 사람이 운동은 무슨...?"
"이 사람아, 노동과 운동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 몰라?"
준비된 반격을 한방 날리고는 줄행랑이다.

그렇지만 명절 밑인데 나도 양심이 있어서 다른 날보다 일찍 들어왔는데 이게 웬일?
아직 치매 걸린 나이도 아니건만 아내는 낮에 빨아 널었던 커텐을 다시 빨고 있지 않은가.
"아니 당신 지금 뭐하고 있는데?"
"보면 몰라요? 빨래를 엉터리로 해서 다시 빠는 거지..."
쫑알쫑알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지는 따발총소리.
이런 빌어먹을 일이 있나.
내 딴엔 모처럼 큰일을 했건만 때가 좀 덜 빠졌기로서니 도와준 보람도 없이 다시 빨 것이 무어람.
실컷 일 해 줬는데 핀잔만 돌아오면 다음에 또 가사노동에 동참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 법.
신세대는 몰라도 쉰 세대 아내들은 이점을 명심할 일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당신, 사람 질리게 만들면 다음에 일 해줄 마음 생겼다가도 달아나겠다"
자기도 심했나 싶었는지
"커텐 빨래는 한번 떼고 붙이기가 너무 힘들어서..."라며 말끝을 흐린다.
기왕 벌여놓은 일, 밤이 늦도록 아내를 도와 헹굼까지 마치고 나니 둘 다 녹초가 되었다.

설날 떡국 나누기

명절에 집에 있으면서 제사도 안 모시니까 한가한 편이다.
그래서 아내의 도움으로 비상 근무하는 직원들 점심이라도 대접하기로 했다.
구청장이 되어 첫 추석을 지나면서 보니까 명절에 비상근무를 하는 직원들은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식당이 쉬기 때문에 배달을 시킬 곳이 마땅치 않아서 대개는 집에서 가져온 간식과 컵라면으로 해결하는 실정이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명절날 점심은 집에서 준비하기로 하고 그 다음 명절부터는 조촐하나마 집에서 점심을 준비하여 직원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작년 추석에는 태풍 매미 때문에 철야한 직원들 아침식사까지 준비하느라 법석을 떨었는데 다른 일에는 깐깐하기 그지없는 아내가 이런 일은 관대해서 고맙기 그지없다.

설날 떡국은 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건인데 끓인 다음에 구청까지 운반을 해서 배식을 해야 하니까 잘 안된다.
퍼진 떡국인데도 맛있게 먹어주는 직원들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다음 설에는 퍼지지 않은 떡국을 제공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설 연휴 마지막 날

설날은 쉬고 다음날 커텐을 다시 다느라 또 한바탕 홍역을 치루고 나니 비록 힘은 들었지만 새 것과 다름없이 산뜻하다.
설 앞 뒷날의 중노동으로 우리 부부는 몸살 직전의 녹초가 되었다.
경제적 가치로 보거나 일년에 한번인 설 명절임을 생각한다면 며칠 일당을 주더라도 세탁소에 맡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은 것이 나의 셈법이라면 아내의 계산은 다르다.
아내는 경제성이나 힘든 노동 여부를 떠나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자기 손으로 가꾸지 않고 남에게 맡긴다는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

남자가 함께해도 힘 드는 일을 아내 혼자 하려면 얼마나 힘들 것인가?
누가 시키거나 안 한다고 잔소리할 사람도 없는데 힘든 빨래를 두 번이나 자청하는 극성스러움이 지나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아내의 알뜰한 살림 덕분에 우리 가정이 이만큼이나마 꾸려짐을 내심 고맙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