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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성삼재-천왕봉) 왕복종주記

질고지놀이마당 2011. 2. 5. 23:51

언제 : 2011. 2. 4. 금. 맑음

누가 : 나홀로

코스 및 소요시간 : 03시 47분 성삼재 출발 - 12시 25분 천왕봉 - 22시 24분 성삼재 도착/ 56.2km 18시간 37분

 

이번 설 연휴에 나홀로 지리산(성삼재-천왕봉) 왕복종주를 함으로써 지리산 3대 종주를 마쳤다.

일명 J-3 라 부르기도 하는 지리산 3대 종주는 태극종주, 화대종주, 천왕봉 왕복종주를 일컫는다.

개인적으로 세운 생애 목표 중의 하나이기도 했던 3대 종주 중에서 태극종주는 2007년 5월에 역시 단독으로 3박4일 일정으로 완주했다.

화대종주는 그간 3회를 했는데 가장 최근의 종주는 2008년 8월에 단체로 완주했다.(치밭목에서 새재마을로 경유하여 유평리로 내려오는 긴코스)

 

왕복종주 주요 지점(이정표) 통과시각 및 소요시간은 다음과 같다.

(편의상 성삼재-천왕봉행을 '상행'으로, 천왕봉-성삼재 행을 '하행'으로 표기)

 

<상행 / 8시간 38분>

 03:47 성삼재 출발 - 노고단대피소 04:14(27분,2분휴식)

노고단들머리 출발04:23-피아골삼거리 04;53-임걸령04:59(노고단~36분) -노루목 05:22- 삼도봉 05:33- 화개재 05:45- 토끼봉 06:08-연하천대피소 06:59 (노고단부터 2시간36분)

벽소령08:04-선비샘08:50-칠성봉09:27-영신봉10:05-세석대피소10:15(5분 휴식)-촛대봉10:37-연하봉11:18-장터목11:30-제석봉11:48-천왕봉12:25(벽소령부터 4시간24분)

 

<하행 / 9시간 54분>

12:30 천왕봉출발-제석봉12:42-장터목대피소 12:52(18분 휴식, 13:10출발)

세석대피소14:03-백소령대피소15:41-연하천대피소17:14(천왕봉에서부터 4시간 44분)

토끼봉18:52-임걸령20:30-노고단고개21:45-성삼재주차장22:24(연하천대피소부터 5시간 10분)

(이정표 표기사진은 작게 올렸으며, 왕복종주를 하면서 만난 풍경사진은 별도로 소개하는 꼭지에 크게 올렸음)

 

03시 47분 인적없이 고요한 가운데 조명만 밝게 빛나는 성삼재 들머리를 출발했다.

 

제설작업을 한 주차장과 달리 들머리를 들어서자 바로 눈길이다.

하지만 워낙 다져진 덕분에 아이젠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일단 그냥 출발한다.

 

노고단대피소까지 완만한 오르막길을 워밍업 한다는 기분으로 걷는데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진다.

토끼해여서 그런가 경쾌한 발걸음이 눈길을 사뿐~깡총 즈려밟는다.

이 길을 걸으면서 가슴 벅찼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04시 14분 노고단대피소 도착

취사장안에는 출발 준비를 하는 산객들이 꽤 부산하다.

아름다운 추억도 만들고, 기연이라고 할만큼 좋은 산벗님들과 인연을 맺기도 한 곳이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잠깐 들러서 간식거리 하나 입에 털어넣고 물한모금만 마시고 곧장 출발이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노고단고개까지 거리는 얼마 안되지만 가파른 계단길이다.

아마도 거의 단숨에 치고 오른것 같다.

나보다 조금 앞서 출발한 이들이 있었는데 사진을 찍을 동안 불빛이 비치지 않는 것을 보면..(하긴 그들은 큰 배낭을 멨다.)

04시 23분 노고단고개에서 천왕봉까지 25.5km 대장정을 시작한다.

누구에게 의지할 수도, 도움받을 곳도 없다.

오로지 내 책임하에 혼자 명령하고 수행하는 작전인 셈이다.

 

 

노고단고개에서부터 임걸령까지는 오르막이 거의 없는 주로 내리막길이다.

성삼재에서 고개까지 충분한 워밍업을 한데다 거칠것없는 내리막길을 만나니까 속도가 절로난다.

노고단고개 출발 후 30분만에 피아골삼거리를 지난다.

 

발동이 걸리기라도 한듯이 구르듯이 내려가는 발걸음에 가속도가 붙는다.

04시 59분 임걸령을 지난다. 노고단 고개에서 3.2km 거리인데 36분 걸렸다.

뭔가를 깨우치기 위해 종주길에 나섰으면서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잠시 망각했다.

나중 돌아오면서 겪게 될 이곳에서의 악전고투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컨디션 좋다고만 쾌재를 불렀으니!

 

05시 22분 노루목에 지나며 부지런한 산행팀을 추월했다.

 

05시 33분 삼도봉에서 또 한명의 등산객을 만났다.

그러고 보니 나만 부지런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혼자인지, 아니면 앞에 가는 이들과 일행인지.. 하여간 또 한팀을 앞질렀다.

 

삼도봉에 서있는 이정표

노고단 고개에서 5.5km를 걸어오는데 1시간 10분 걸렸다.

이런 속도로 이동한다면 천왕봉까지 8시간이면 가능한 것 아냐?

초반의 날아갈듯한 컨디션만 믿고 김치국부터 마셔본다.

마라톤을 뛰어보면 항상 반환점을 돌고나서 후반부에 체력이 뚝 떨어지곤 했으면서..

 

05시 45분 화개재를 지난다.

늘 이곳을 지날때면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며~'로 시작되는 조영남의 노래가 생각난다.

지게와 봇짐을 이고지고 물물교환과 인심까지 나눴을 화개재엔 하얗게 쌓인 눈위로 바람만 오간다.

날씨가 춥지 않아서 망정이지 지난 1월의 혹한이었다면 이런 마음의 호사를 누릴 처지가 못됐을 것이다.

 

06시 08분 토끼봉을 지난다.

화개재와 연하천대피소 중간에 우뚝 선 이곳 토끼봉은 어느쪽에서든 오르막이 꽤 긴것 같다.

가는 길에는 힘든줄 모르고 후딱 넘었는데 돌아오면서 연하천대피소에서 토끼봉까지 오르면서 무척 힘들었다.

불과 2.4km를 1시간 38분 걸렸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임걸령-연하천대피소 구간의 시간 기록을 대조해 보니까 상행은 2시간, 하행은 3시간 16분으로 무려 1시간 16분이나 차이가 났다.

 

06시 59분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토끼봉을 내려오면서 처음으로 마주오는 산객 한명을 만났다.

설 연휴이기는 하지만 주말연휴와 달리 아직 산객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적중한 것 같다.

아직 대피소 전체가 조용한 시각이라 살금살금 샘터로 가서 차디찬 샘물 한바가지를 퍼 마시고 바로 출발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동녘하늘이 발그레 물들어 오는데 어디 전망이 트인 곳을 지날때 일출장면을 만났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일출에 대한 바램은 바램일뿐, 현실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한동안 키 큰 나무숲으로 이어지는 구간이기도 했지만 해돋이 순간이 그다지 황홀하지도 않았다.

그렇더라도 전망이 탁 트인 능선길이었다면 해뜨기전 시시각각 붉게 물드는 하늘색이라도 담았을텐데..하는 아쉬움은 과욕이다.

하긴 등산을 목적으로 하면서 멋진 일출장면을 담고싶다는 욕심은 소발에 쥐잡기와 같은 바램임을 알면서도 늘 한자락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다.

 

벽소령대피소까지는 약 두시간 거리다.

지리산은 군데군데 대피소가 있고, 샘터가 있어 산꾼들에게 축복받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아침 여명도 일출도 그저 그렇고, 아침햇살에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도 별 감흥이 없다.

왕복종주는 체력 및 시간과의 싸움이기에 풍경 다 보고, 사진 찍고싶은 것 다 담고, 쉴 것 쉬고 노닥거리며 걷는 길이 아니건만 내 마음은 여전히 풍경타령이다.

어쩌면 좀 단조롭고 지루한 길이니까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한다.

08시 04분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 몇 명의 산객이 막 아침을 먹고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나도 좀 쉴까 하다가 시간이 아까워서 간식을 좀 꺼내서 주머니에 넣고 출발했다.

벽소령대피소에서 한동안은 거의 평지면서 걷기좋은 산책코스와 같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복종주를 위해서는 무조건 시간을 아껴야 했다.

오죽하면 내 자신 늘 메고 다니는 DSLR 카메라를 내려놓고 똑딱이 하나만 들고 나섰을까..  

 

희끄므레 하던 하늘색이 점점 에메랄드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어?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하늘색만 고운 것이 아니라 어디서 날아왔는지 깃털같은 구름이 조금씩 날리고 있다.

 

08시 50분 선비샘에 도착했다.

항상 이곳을 지날때면 그랬듯이 시원한 샘물 한 모금을 기대했는데 물이 없다. 마른 것인지 얼어붙은 것인지..

그러나 샘에 샘물이 없다는 아쉬움은 파란 하늘과 하얀구름이 연출하는 하늘풍경의 시원함이 상쇄하고도 남았다.

 

09시 27분 칠성봉을 지나고..

 

10시 05분 영신봉을 지난다.

氣가 센 편이라는 지리산에서도 영험한 기운이 모였다해서 붙여진 이름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신봉이란 이름에서 느낌은 그렇다.

그리고 2006년 5월에 나홀로 태극종주길에 만났던 한 여성산악인이 떠오르는 산이기도 하다.

연하천대피소 직전에서 우연찮게 동행하게 돼서 다음날 그녀가 새재마을로 하산할 때까지 주욱 동행하면서 모르는 길 도움도 받고, 지리산에 대한 많은 귀동냥을 했었다.

 

그녀는 내가 감탄할 정도로 지리산의 수많은 능선과 계곡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나는 지리산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도 그 때 깨달았다.

지리산이 영험한 산이라는 것도, 영신봉 어디쯤에 더 영험한 바위가 숨겨져 있다는 것도 그녀에게 들었다.

또한 진실로 지리산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산꾼들은 그렇게 옛날부터 전해오는 구전을 따라 순례하듯이 비법정 등산로를 답사하고 때론 개척한다는 것도..

산에 대한 열정과 지식으로 보아 지금도 자신의 일과 취미를 공존하면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하얀 눈밭으로 변한 세석평전

이곳에 현대식 새석대피소를 짓고 주변을 정비하기 전까지의 새석평전은 그야말로 피난민촌 같았다.

아무렇게나 텐트치고 야영하던 풍경들이 지금은 기록을 통해서나 볼 수 있는데 황폐화된 자연이 복원되기 까지는 아직도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세석대피소에서 촛대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눈길로 드러난다.

 

10시 37분 촛대봉

시간을 아끼느라 세석대피소에 들리지 않고 촛대봉 오르는 길에 잠시 쉬면서 간식을 들었다.

왕복종주길이어서 도시락보다는 행동식을 때울 수 있는 간식만 약간 준비했다.

하긴 당일 산행을 할 경우는(특히 겨울산행은) 대부분 번거로운 도시락 보다는 간식으로 때우는 편이다.

이쪽저쪽 인증샷만 몇 장 남기고 이내 출발이다.

 

꼭 2년전 설 연휴에는 아내랑 같이 이곳을 지나면서 멋진 설경을 만나 감탄하던 일이 생각난다.

경치도 좋았지만 시야가 맑아서 저 멀리 남-북 덕유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그 때에 비해서는 덜 맑은 편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하늘과 구름이 환상적인 배경그림을 만들어 준다.

 

11시 18분 연하봉

바람이 몰아다 쌓은 눈높이가 이정표를 거의 묻어버릴 정도로 높다.

 

11시 30분 장터목대피소

이곳까지 예정보다 30분정도 지체됐다.

아직은 지쳐서 걸음이 늦다기 보다는 풍경사진을 찍느라 잠깐씩일지라도 지체되는 시간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가랑비에 옷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잽도 자꾸 맞으면 데미지가 쌓이는 것처럼..

여기서도 쉬지않고 데크에서 좌우측 풍경사진만 몇 장 찍고는 발길을 재촉한다.(오죽하면 화장실도 천왕봉 갔다가 되돌아 올 때까지 참았다.)

시간을 아끼느라 5분 이상을 쉬지 못하고, 식사도 따로 하는게 아니라 걷는 틈틈이 간식을 우물거리는 것으로 대신하면서도 사진찍는 시간은 너무 관대했다.

 

11시 48분 제석봉

제석봉 지나는 구간에서 파란하늘과 하얀구름의 연출은 절정을 이룬다.(별도 꼭지로 소개하는 풍경사진 참조)

자연의 조화랄까 아니 구름의 변덕은 하도 심해서 시시각각 변한다.

아니 구름이 변덕스럽다기 보다는 바람이 한시도 구름을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이런 풍경은 다음으로 미루면 십중팔구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바로 지금, 자신이 보고 좋다고 생각할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무릇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아니 삶은 취미보다 더 치열하고 한번 놓친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런 나의 경험과 판단은 이번에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천왕봉 도착할 무렵부터 하늘은 더 이상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갔으므로..

어쨌든 아름다운 하늘풍경 덕분에 갈길이 매우 바쁜 걸음을 많이 지체했다.

단 한사람도 추월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이동을 해 왔음에도 이 구간(제석봉-천왕봉)에서는 앞지르기를 허용할 정도로.

 

12시 25분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씌어진 천왕봉 정상석 옆에 섰다.

하늘아래 첫 자리, 이곳 어딘가에는 천주봉이라 새겨진 바윗돌이 있는데 다음에 오면 인증샷을 남겨야겠다.

성삼재 주차장 출발부터 이곳까지 오면서 휴식과 사진촬영 일체를 포함해서 8시간 38분 걸렸다.

 

실은 나 자신 시간을 다투는 산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에 쫓기듯이 허겁지겁 다니는 산행이 아니라 유유자적 풍경을 즐기면서 마음에 드는 곳은 쉬었다 가기도 하는 그런 산행을 원한다.

하여 무슨무슨 종주산행이나 단체 안내산행에 점점 흥미를 잃고 절반 이상 나홀로 산행을 하는 편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유독 이번 왕복종주에 시간을 분 단위로 따지며 기록하는 이유는 지리산 3대 종주의 하나라는 점 때문이다.

나 자신이 세운 삶의 목표 중 하나였던 지리산 3대 종주의 방점을 찍는다는 감회와 더불어 이것만큼은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나홀로 왕복종주를 준비하면서 누군가가 남긴 기록의 도움을 받았듯이 내 기록도 누군가에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임을 생각한다.

 

천왕봉 정상석에서 다른 산객에게 부탁하여 이번 왕복종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인증샷을 하나 남겼다.

온만큼 돌아가야 할 길이 남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오늘의 왕복종주 성공을 예감하며, 이미 성공한 기분을 누렸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은 이래서 중요하다.

나는 내가 꼭 이룰 목표를 세우기도 하지만,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진실로 믿는다.

 

이후 구간은 사진이 없다.

공교롭게도 천왕봉에 올라서면서 똑딱이 카메라의 전원이 거의 다 됐다는 신호가 점멸됐다.

몇 장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 몰라 아껴가면서 인증샷 날리고, 너댓장쯤 더 찍었나?

아껴가면서 돌아가는 주요 대목만이라도 남겨야지 했는데 멀리 가지 못하고 장터목대피소에서 꼴까닥 숨이 멎어 버렸다.

이 또한 소중한 경험이자, 교훈이라 생각한다.

내가 지닌 카메라의 밧데리나 메모리 용량이 왕복종주 끝까지 가능한지를 따져보지 않은 것은 내 불찰이다.

따져보고 예측하고 충분하지 못하면 적절히 안배했어야 했다.

 

궁즉통이라고 휴대폰으로 주요 이정표 인증샷은 남겼지만 블로그에 소개할 정도는 안되는 것 같다.

한편, 카메라 밧데리가 다 된 안타까움을 반대로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계속 작동을 했다면 아마도 내 의지만으로는 발걸음 자꾸 멈추는 것을 단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돌아오는 길은 계속 지체됐을 것이고 그만큼 더 힘들었을 것이니까..

 

천왕봉에서 머문 시간은 약 5분, 인증샷만 몇 장 찍고는 냅다 뛰다시피 장터목대피소로 내려오는데 불과 20분 남짓 걸렸다.

하지만 빠른 하산으로 번 시간보다 더 긴 시간동안을 장터목대피소에서 다 까먹었다.

그간 참았던 화장실 볼 일과 약간의 간식섭취, 그리고 사진을 담은 문자를 발송하느라고..

 

이후 구간은 벽소령대피소까지는 상행보다 하행이 1시간이나 빨랐다.

벽소령 - 천왕봉 소요시간 : 상행 4시간 21분 / 하행 3시간 21분

그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하면 첫째는 코스의 고저차이로 인한 것이며,

둘째는 사진을 찍느라 지체된 점,

셋째는 연하천 통과가 늦으면 붙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무척 서둘렀다.(연하천에서 4시반이 넘으면 야간산행 못하도록 통제한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본 기억) 

 

그러나 연하천대피소 이후 노고단고개까지의 구간은 상행보다 하행이 거의 두시간 가까이 더걸렸다.

이곳 역시 코스의 고저차이가 있는데다가 무엇보다도 피로가 누적되어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초반에는 1시간에 4km를 어렵지 않게 이동했지만 막바지에는 3km도 이동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말의 불안감을 갖고 있던 연하천대피소에서의 야산금지 통제는 받지 않았다.

인터넷에 올려진 산행기에서 오후 4시 반이면 통제한다고 본 것 같아서 아무리 발걸음을 재촉해도 시간단축이 그리 녹녹하질 않았다.

결국 내가 연하천대피소를 통과한 시각은 벌써 산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17시 14분이었다.

상행 때 연하천에서 벽소령까지 1시간 5분 걸렸는데 하행 소요시간은 그보다 오랜 1시간 23분이나 걸렸다.

그만큼 체력이 소진된 것이다.

 

연하천 이후는 피로 누적과 고갈된 체력에 더하여 마음의 각오까지도 많이 흐트러진 것도 사실이다.

앞서는 '연하천 통과시간'이 내 맘속에 정해져 있어서 끊임없이 자신을 독려했는데 이제는 까짓거 가기만 가면 된다는 해이감이 있었던 것이다.

반야봉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며 그냥 쉬고 싶었다.

 

가장 힘들었던 구간은 명선봉을 거쳐 토끼봉까지의 구간이었던 것 같다.

기록을 확인해 보니까 이정표 상으로 2.4km에 불과한 거리인데 1시간 38분이나 걸렸으니 이해가 안갈 정도다.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했던 피로감, 정신적 해이감 등이 더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기록은 정확하고 냉정하다.

화개재 이후는 체력저하를 감안하여 스스로의 페이스를 1 시간에 2.5km 정도로 천천히 가자고 생각했다.

기록경기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닌데 완주만 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편하게 가졌다.

 

연하천에서 묵을 산꾼들이 스쳐가면서 힘들고 지친 내모습을 보는 눈빛에 걱정과 연민이 서려 있음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난 왕복종주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살아 있어서 오히려 무거운 베낭을 짊어진 그들의 밤길을 걱정했다.

아직도 밤길 10km 이상을 더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다.

한동안 마주치던 산객들의 발걸음도 저녁 여덟시쯤을 지나면서는 완전히 끊겼다.

한낮에 봄날처럼 포근하던 날씨도 바람과 함께 옷깃을 파고드는 추위로 손발이 시려왔다.

 

같은 밤인데도 새벽과 달리 저녁의 깊어가는 밤의 느낌은 달랐다.

피로감에 더하여 적막감과 외로움 등등 이제 비로소 극한상황에 부딪히는 극기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자신감 오만함 등등을 털어내는 과정이었을까, 비로소 자연의 위대함과 그 안에 티끌같은 내 존재감이 떠올랐다.

온갖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거의 무아지경으로 걷는데 걸으면서도 졸음이 밀려왔고, 주저앉아 쉬고 싶었다.

전날 울산에서 밤 10시쯤 출발하여 이곳까지 자가운전으로 이동하고, 1시간 반쯤 차안에서 새우잠을 자고 출발했으니까 수면부족에 피로까지 겹친 상황이다.

 

그럼에도 쉴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다짐하며 째찍질하는 한마디는 '졸면 죽는다'였다.

잠시 쉰다고 앉았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깜박 잠에 빠져들기 십상이고, 겨울 산속에서 잠들면 그 길로 깨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거의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하는 걸음걸이를 옮기면서도 5백미터씩 좁혀지는 이정표를 꼬박꼬박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노고단 고개에 올라서는 순간,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성삼재 주차장까지는 아직도 2.6km가 남아있다.

하지만 계속 내리막 길인데 시쳇말로 거꾸로 매달려서라도 못 가겠는가?

실제 이 구간 소요시간을 대조해 보니까 출발할때는 오르막인데도 36분 걸렸는데 귀로에는 내리막임에도 39분 걸린 것에서도 피로도가 드러난다 .

 

성삼재-연하천 구간의 소요시간을 대조해 보면 더욱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상행은 3시간 12분 걸렸는데 돌아오는 길은 5시간 10분 걸렸으니 코스의 고저도 차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체력 안배가 큼을 알 수 있다.

혹시 왕복종주를 준비하는 산객이 있다면 마라톤처럼 구간별 고저도(산경표)를 감안한 랩타임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이로써 j-3 즉 지리산 3대 종주의 목표에 마침표를 찍으며, 종주기 또한 마감한다.

 

 

[에필로그]

그런데 왜 난 어찌보면 무모하기조차 한 이번 도전을 하게 되었을까?

스스로의 자문자답을 통해 궁금해 할 누군가에게 미리 답변을 남긴다.

무엇보다도 끝없는 도전과 성취감을 통해서 내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었다.

내 스스로 정한 삶의 목표 중에서 하나인 지리산 3대종주의 미결과제인 왕복종주를 계속 미루는 것은 솔직히 부담이었다.

나이 한살씩 더 먹으면서 체력과 의지력은 약해질 것이니까 미룰수록 불리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내 자신의 체력과 정신력을 테스트하고 싶었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하고, 시험에 빠뜨리더라도 몸과 마음이 이겨낼 수 있을지를 말이다.

한계상황에 도전하고 극복함으로써 기초체력은 물론, 어떠한 시련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워야 했다.

가깝게는 지난 1년간 쉬었던 마라톤 풀코스 도전을 앞두고 있으며, 내 생애 또하나의 도전목표로 정한 '존뮤어트레일'종주가 남아있다.

 

이번 설 연휴에 왕복종주를 나선것은 미리 세운 계획이 아니었다.

뭘 할까? 고심하면서 날씨가 혹독하게 추웠으면 설악산 태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을 후보지로 두고 설화가 맺힌 겨울산행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1월내내 강추위를 기록했던 겨울날씨가 설 연휴로 접어들면서 봄날처럼 포근해지는 바람에 혹한기 산행 목표는 수정이 불가피했다.

즉 나의 갑작스런 지리산 왕복종주 도전은 날씨가 포근해진 덕분에 혹한기 산행 대신에 바꿔친, 말하자면 대타였다.

 

겨울철에 나홀로 왕복종주를 나섰다가 악천후를 만나는 경우를 생각하면 너무나 무모하고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미리 일정 계획을 세우지 않고, 울산 출발 직전에 주말까지 날씨가 좋다는 예보를 참조했기 때문에 날씨를 믿을 수가 있었다.

겨울답지않게 워낙 날씨가 좋을 것임을 믿을 수 있는 예보에다가 설 연휴 중이어서 역발상이 가능했다.

더위와 갈증이 없고, 왕복종주에서 또하나의 걸림돌인 오가는 등산객이 혼잡한 때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겨울철 도전이 더 불리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더 유리 할 수도 있다는 내 예상은 적중했다.

더위와 추위는 물론, 갈증으로 인한 고통이 거의 없었고(물 1리터와 팩음료 4개로 해결), 등로의 혼잡도 최소였다.

심지어 울산에서 설 연휴에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성삼재까지 왕복하면서 단 한차례도 정체를 겪지 않았다.

어찌보면 즉흥적인 결정이고 행운이 따른 결과라 하겠지만 나홀로 산행이 갖는 순발력의 장점이라 하겠다.

 

스스로에게 감사하고 또한 다짐한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자.

꿈은 이루어진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준비하고 도전하자. 

긴 글인데 끝까지 읽은 당신에게도 감사하며 반드시 성공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