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정치/밥 일 꿈- 도전

조승수와의 만남부터 동행과 경쟁, 그를 위한 변론 및 지지요청

질고지놀이마당 2014. 6. 1. 03:36

이번 6.4 동시지방선거에서 울산광역시장으로 출마하여 야권단일후보 경선을 펼쳤던 조승수 후보는 동지적 관계가 더 많았던 경쟁자다.

조승수 후보는 이번 야권 단일화 경선에서 '불리해 보이는 여건' (그러나 선거를 아는 사람이 보면 그렇지 않은) 임에도 나를 누르고 단일후보 타이틀을 획득했다.

 

오랜기간 동지적 관계가 더 길었으나 정치판의 속성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숙명처럼 경쟁관계가 불가피하기도 했던 사이다.

조승수 후보와의 인연부터 동행과 경쟁, 그리고 단일후보가 된 조승수 후보(이하 조승수)의 '약점'에 대한 변론과 최종적으로 지지를 호소하고자 이 글을 쓴다.

 

 

1. 조승수와의 인연

젊은 패기가 느껴지는, 그러나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인지 인텔리라기 보다는 건강한 노동자 느낌을 주는 그를 만난 것은 90년대 초다.

당시로서는 노동운동가들에게 터부시되던 진보정당 활동을 하는 그를 보면서의 첫 느낌은 그야말로 '돈 안되는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은 재개발 되어서 사라진 새마을아파트 아래 공작쪽문 맞은편에 작은 사무실이 있었고, 진보정당 간판으로 출마를 해봤자 의미있는 득표를 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한편으로 조승수-이현숙 부부는 성남동에서 이른바 이념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신새벽 서점을 운영하였는데 '돈 안되는 일'이기는 서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한가지 목표를 향해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던 젊은이가 지금의 조승수다.

 

 

2. 마침내 꽃피운 조승수의 꿈

내가 보기에 조승수는 관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낭인'처럼 돈안되는 일만 쫓는 것 같았던 조승수가 마침내 지방자치 선거에 출마하여 시의원에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95년 치러진 지방선거 당시는 울산이 광역시가 되기 전의 일반시였고, 동별로 시의원을 뽑는 소선거구제였다.

조승수는 현대자동차 앞 노동자 밀집지역인 양정동에서 진정추 활동을 하였으나 당선가능성이 높은 양정동은 현자노조 소속 후보에게 밀려서 당시 동구 관할이었던 염포동으로 옮겨서 출마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염포동에 연고도 없고, 현자노조와도 연관이 없는 무명(?)의 정치신인이 당선될 확률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결과는 놀랍게도 당선, 아슬아슬하나마 신승을 거머쥐었다.

당선의 비결은 바로 구도였다.

유력한 지역 유지 두 사람이 맞붙은 틈바구니에 정치신인이 끼어 든 삼자구도, 즉 황금분할에서 야권성향의 표결집으로 일궈낸 값진 성과였다.

조승수는 이렇게 초지일관한 진보 정치인의 꿈을 예상보다 일찍 이루면서 제도권에 첫발을 내디뎠다.

 

 

3. 조승수의 승승장구 날개를 달다.

조승수의 첫 의회 진출은 기초의원이었으나 97년 7월 15일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광역의원을 겸직하게 된다.

그리고 98년 지방선거에서는 광역시 승격으로 신설된 북구의 첫 민선구청장 후보로 출마하여 당당히 당선되었다.

이 또한 관운이 따라준 것이 조승수의 지역구인 염포동은 동구였으나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북구로 편입되면서 첫 민선 북구청장 출마의 길이 열렸다.

98년도 지방자치 선거는 IMF 사태를 거치면서 노동계에 불어닥친 정리해고 칼바람에 노동계가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바람을 타고 조승수는 북구청장으로 나는 울산광역시의원으로 함께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 시절 일화 한토막을 소개한다.

내가 시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가끔 구청장실에 들리곤 했는데 구청장실에는 마라톤을 뛰는 조승수 구청장의 사진과 완주 기록증이 걸려 있었다.

하프코스 기록이었지만 당시까지 마라톤 하프코스를 뛰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의 젊음과 건강과 패기가 부러웠다.

이 기억은 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이후에 내가 북구청장 재직중에 직무정지를 당하여 시련을 겪을 때 마라톤 풀코스를 도전하게 하는 기제가 되었다.

 

 

4. 민주노동당 창당과 더불어 동지적 관계로

노동조합 간부를 거쳐 시의원에 진출한 나와,  진보정치를 개척하면서 기초의원 및 북구청장이 된 조승수와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고 동반자였으며, 동지적 관계였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숙명의 경쟁관계가 된 것은 2002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내가 북구청장 출마를 결심하게 되면서 부터다.

조승수는 진보적인 첫 민선구청장으로서 구정을 잘 이끌었고, 나 역시 '똑소리 나는 시의원'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던 중 2000년 총선에서 북구가 인구 증가로 독립 선거구가 되어 첫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되었다.

현자노조 대의원대회에서 노동계 국회의원 후보 경선을 거쳤는데 시의원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내가 후보로 선출되었다.

공직 사퇴시한에 따라 시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본선을 준비하던 중 창당 초창기였던 민노당 내에서 당내 경선 요구로 정작 당내 후보 경선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너무 길어지니까 생락하고 넘어간다.

 

이때부터 민노당 내에서는 소위 운동권 내부의 고질적 병폐인 NL계와 PD계열간 정파 대결이 치열했다.

한마디만 더 첨언하면 지금의 통진당은 NL계열이고, 민노당에서 종북문제를 제기하며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했던 그룹은  PD계열이었다.

울산에서 두 세력의 중심 인물은 김창현과 조승수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 중퇴학력으로 학생운동권 근처에는 가 볼 기회도 없었고, 순수한 자생적 노동운동가였던 나는 사실 NL과 PD 그 어느쪽도 아니었다.

다만, 현직 시의원이었기에 민노당 울산시당 당연직 운영위원으로 주요 회의에 참석하면서 정파간 대립을 알게 되었다.

주욱 지켜보니까 NL계열 인사들이 정파적 입장이 강했고, 주요한 사안이 생기면 사전에 조직적으로 입장을 통일해서 나오는 것이 다 읽혀져서 못마땅했다.

나로서는 어느 쪽을 무작정 편드는 것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옳은 편'에 선다고 했는데 NL과 PD가 대립되는 안건이 많았다.

그런 경우에 난상토론을 하다가도 표결을 하게되면 조직적인 표결 행태를 보이는 Nl쪽에 비판적이거나 반대 입장을 취하는 빈도가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NL쪽은 나를 경계하면서 PD계열로 분류했고, 반대로 PD는 의정활동 평가를 잘받는 시의원 하나가 제발로 굴러온 격이니 환대를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NL계열의 조직인 울산연합에 맞서는 PD계열 모임도 있었는데 명칭이 '우리모임'이었다.

어느 시점에 연락을 받고 갖더니 울산연합을 제외하고 알만한 활동가들이 거의 다 모인 모임으로서 조승수도 주요 멤버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얼결에 '우리모임' 일원이 되었고, 조승수와는 그냥 진보운동을 하고 있는 아는 사람 정도에서 완전히 한 배를 탄 운명이 되었다.

 

 

5. 동반자적 동지에서 운명의 경쟁자로

동지적 관계가 된 조승수와 운명의 경쟁관계가 된 것은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서다.

시의원직은 사퇴하였으나 국회의원 출마도 막히는 바람에 현장에 복귀하여 절치부심하던 나에게 구청장 출마를 강권한 것은 노동운동을 함께 한 현장 동지들이다.

나는  '우리모임' 일원이면서 동지적 관계인, 그리고 최연소 구청장에 당선되어 일 잘하는 조승수가 있는데 어떻게 출마하냐고 고사를 했다.

하지만 현장 동지들은 정치의 세계는 안면 때문에 양보를 하면 기회는 오지 않는다,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인데 어떠냐며 출마를 종용했다.

 

그래도 인간관계상 그럴 수 있느냐고 망설이던 차에 민주노총 지역본부에서 노동계의 힘을 배경으로 진보정치권에 강제하다시피하는 경선 룰을 만들었다.

원래 취지는 울산시장후보 경선을 염두에 두고 조합원 총투표를 통한 경선룰을 만든 것인데 기초단체장을 포함하여 모든 공직후보에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민주노동당이 유일한 진보정당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민주노총 지역본부가 노조의 힘을 바탕으로 강제할 힘이 있었다.

현장 동지들은 내가 출마하지 않으면 조승수를 견제하는 NL 계열에서 후보를 낼 수 있으므로 내가 출마하는 것이 그나마 그들을 견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저런 과정을 거쳐 현직 북구청장이었던 조승수와의 후보경선을 하게 된 것이 그와의 첫 경쟁관계다.

경선 결과는 당원투표에서는 내가 졌지만 그보다 쪽수가 훨씬 많은 조합원 총투표에서는 내가 이겨서 합산결과로 승패가 갈렸다.

그렇게 조승수와의 첫 경선에서는 내가 승리하여 민선2기 구청장 후보가 되었고, 본선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민선2기 북구청장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건데 당시 북구청장 후보 경선 룰은 조승수 입장에서는 불리함을 감수해야 하는 경선이었다.

즉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조합원 총투표 경선방식은 NL의 실질적 대표이자 시장후보로 유력하게 꼽히던 김창현 후보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방식을 북구청장 경선에 그대로 적용하게 되니까 '학생운동 출신'인 조승수에게도 불리하게 작용되는 경선 룰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국내 최대 조합원이 속한 현대자동차 노조위원장을 지냈기 때문에 조합원 총투표 결과로 사실상 승패가 갈리는 경선이었다.

 

조승수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경선룰이 불리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우리모임'에서 만든 룰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불리한 룰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경선에 참여하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모습은 지금도 내 머리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조승수가 나보다 연배는 한참 아래지만 정치인의 반열에서는 내가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6. 다시 동반자적 동지의 관계로 

내가 구청장 후보가 되어 선거운동을 하면서 북구 전역을 누비고 다닐때 조승수는 현직 구청장이라서 선거운동을 도울 수가 없었다.

대신 조 청장의 부인이 내 선거를 열심히 도왔는데 나는 입장이 바뀌었다고 가정하면 과연 저렇게 헌신적일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부창부수라 했던가, 내 머리속에 각인된 조승수도 참 괜찮은 정치인이지만 그의 아내 이현숙 여사는 조승수보다도 더 깊은 신뢰를 남겼다.

 

기성 정치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경선과 깨끗한 승복, 그리고 헌신적으로 승자의 선거를 돕는 일이 실제로 가능함을 조승수 부부는 실천으로 보여줬다.

그 이후 정치인 조승수가 내게 실망을 안겨 준 적은 더러 있었지만 그의 아내 이현숙 여사는 한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각설하고 나는 전도 유망한 젊은 정치인의 앞길을 막았다는 미안감 때문이라도 구청장직 수행을 조승수보다 잘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실제 평가에서 역대 어느 구청장보다 뒤지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2004년 총선에서 조승수가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을 때 나는 빚을 갚는 심정으로 그의 당선을 기원했고, 현직 구청장이라 직접 도울 수는 없었지만 도움이 될만한 일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구청장 후보 경선에서 낙마했던 아픔을 딛고 화려하게 재기했다.

다만 선거 과정에서 북구 자원화시설에 대한 입장을 바꾸는 정치인 조승수에게 첫 실망을 하게 되는데, 후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한다.

문제는 조승수 후보가 선거운동 과정에 자원화시설 문제에 대해 주민들에게 약속했던 문서 한장이 빌미가 되어 중도에 국회의원직을 잃게되는 수난을 당한다.

 

 

7. 이후의 각자 다른 길을 걷다.

사설이 길었는데 나는 구청장직 말미에 공무원노조 파업 가담자는 전원 중징계 하라는 중앙정부 지침을 거부하다 직무유기죄로 고발당해 유죄판결을 받고 직무정지상태에서 구청장직 복귀를 못하고 재출마의 길도 막혔다.

그 일로 민노당 중앙당과 갈등이 많았는데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민노당을 탈당 함으로써 조승수와도 정치적 결별을 하게 된다.

그런데 조승수 역시 2008년에 민노당의 정체성과 종북논란을 제기하며 민노당 탈당을 주도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민노당 탈당 후 진보신당으로 옮겨간 인사들과 친했기 때문에 만약 민노당을 탈당하지 않고 있었으면 나 역시 진보신당으로 합류했을 것이다.

 

어쨋든 나는 2007년 8월 탈당 후 2011년 9월 민주당에 입당을 할 때까지 당적을 갖지 않고 무소속으로 있으면서 심정적으로는 진보신당을 응원했다.

하지만 국민참여당 인사들과 함께 민노당과의 재결합을 통해 통합진보당으로 합당하는 정치인 조승수에게 두번째 실망을 하게 됐다.

통합진보당과의 합당에 대해 진보신당 평당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상층단위 명망성 정치인 몇 명만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통합진보당으로 가는 모양새는 아무리 좋게 보려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였다.

 

민노당 탈당이후 소수정당으로 어려움을 함께 했던 진보신당의 '평당원들을  버리고' 합당한 통합진보당은 다들 알다시피 2012년 총선과정에서 당내 부정경선과 야권단일화 여론조사 부정, 이석기 사태 등을 거치면서 다시 갈라서게 된다.

정치인 조승수에게 첫번째 흠결이 있다면 진보의 가치는 지켜 왔으되 분당과 합당, 분당을 하는 과정의 반복과 믿고 따랐던 진보신당 당원들과의 결별이라 하겠다.

그리고 지난 2012년 총선 과정에서 울산 통진당내 실세이자 라이벌이던 김창현이 지역구를 북구로 옮겨오는 바람에 당내 역학구도에서 밀려(?) 지역구를 남구갑으로 옮긴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겠지만 흠결로 꼽는다.

 

 

8. 정치인 조승수가 아닌, 인간 조승수를 위한 변론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꼽은 몇가지 실망과 흠결에도 불구하고 조승수는 진보진영에서 키워야 할 귀중한 인적자원이라 생각한다.

새누리당이나 기성 보수 정치인들이 지닌 부도덕함에 비하면 내가 조승수에게 지적한 흠결은 흠결도 아니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서로 속한 정당이 다르고, 각자 처한 당의 입장과 목표가 있기에 맞설 수 밖에 없었을 뿐, 나와 조승수가 같은 당 소속이었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를 시장후보로 추대하는데 앞장서고 그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다만 이번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조승수 후보의 음주와 무면허 전과경력은 나도 당혹스러운 부분이었다.

왜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후보자의 전과기록 공개 기준이 강화된 때문에 십수년 전의 전과들이 이번에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단일화 경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약점이 드러난 것은 호재인 셈인데 차마 그걸 정면으로 공격하기는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둘 중 누군가는 단일후보가 돼야 하는데 내가 되면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가 되면 내가 들쑤신 흠결은 고스란히 야권단일후보에게 부담으로 남는다.

다행스럽게도(?) 상호토론 순서가 맨 마지막이어서 새누리당 후보가 선공을 하는 바람에 내 고민은 덜어졌다.

 

그렇다고 그냥 덮고 가는 것도 뭣해서 따끔한 일침은 날렸다.

'진보 정치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큰 실수를 했네요, 새정치민주연합의 개혁공천 기준으로는 공천배제 대상'이라고.

아마도 조승수 입장에서는 새누리당 김기현 후보의 파상적인 공격보다 점잖게 일침을 가한 표현이 더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하여 이제 야권단일후보가 된 조승수 후보를 위한 변론을 좀 해야겠다.

 

누구라도 그렇지만 공인으로서는 더욱 하지 말았어야 할 실수를 했던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03년이다.

2003년이라면 정치인 조승수 이전에 인간 조승수로서 힘든 시기였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연민의 마음이 든다.

95년 첫 시의원 당선이후 승승장구 하다가 2002년 구청장 후보 경선에서 나한테 패배하여 한창 시련기였던 시절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내 전임자였던 조승수에 대한 구청 직원들의 평은 직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두주불사, 주량으로 누구에게 진 적이 없는 '호걸'로 통했다.

 

그런 그가 날개 꺾인 새처럼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 누군가와 술잔을 나누고는 운전대를 잡는 실수를 했구나, 유추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음주와 무면허는 대개 바늘과 실처럼 따라 다닌다.

하지 말았어야 할 실수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 조승수가 그런 실수를 하게 된 인과관계에서 나도 본의아니게 일조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창 뻗어 나가야 할 진보정치인 재목의 앞날을 내가 가로막은 셈이었고 그런 시련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런 실수를 한 것에 대해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9. 조승수 후보에 대한 지지부탁

지금까지 이상범과 조승수의 만남 과정부터 때론 동지로 때론 경쟁자였던 과정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조승수는 인간적으로나 정치인으로서 범상치 않은 출중함을 가지고 있고, 반면에 인간적인 흠결도 있었다.

그런 한편 조승수는 초지일관 한가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인생승부를 걸고 달려온 진보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는 패배를 인정할 줄 알았고, 승자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일찌기 보여 주었다.

특히 그의 부인 이현숙 여사가 내게 남긴 인상적인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조승수-이현숙 부부가 나에게 보여 주었던 것처럼 이번 경선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조승수 후보의 당선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하겠다는 약속과 실천, 그리고 조 후보에 대한 지지를 간곡하게 호소한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번 단일화경선에서 그의 승리는 실력과 운이 함께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당초 3자 단일화 경선 구도였다면 나 자신도 내가 이길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고 생각하며, 많은 선거전문가들도 그렇게 진단한다.

하지만 내가 속한 중앙당에서 단일화를 반대함으로써 나는 단일화를 파기해야 했고 그로인해 실리와 명분 둘 다를 잃었다.

그 때부터 단일화에 대해서 조승수 후보는 주도적으로 공세적인 입장을 취했고 나는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이 되었다.

울산에서 단일화 추진은 절대 선으로, 단일화 반대나 회피는 악으로 취급되는 대중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통진당 이영순 후보의 사퇴로 양자 단일화 구도가 되면서 판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당내에서는 여전히 단일화 반대가 다수이다 보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명분 실리 다 잃고 때도 놓치고 말았다.

내가 속한 새정치민주연합 당원들의 당에 대한 정체성 소속감 충성도는 그야말로 한지붕 세가족 수준인 상태였다.

지연 학연 혈연이 없는 후보, 대중적 인지도도 낮은 후보가 믿을 것이라고는 당지지도 하나 뿐이었는데 전략과 전술 부재로 그것조차 양보했다.

우리당은 중앙당에서 아무런 지원이 없었으나 정의당은 중앙당에서 총력 지원체제였다.

결국 실력도 운도 다 부족했으니 결과는 필패로 나타날 수밖에...

 

단일화를 안하고 끝까지 완주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도 그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단일화 경선에서 패배하면 그야말로 패가망신 할 정도의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라도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조 후보와 나는 야당 1~2등을 누가 하느냐, 선거비용 보전을 받느냐 못받느냐를 가지고 경쟁해야 한다.

개인으로서는 큰 문제이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대의명분을 잃고, 야권 분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수가 없다.

주위에서 아무리 뭐라고 하더라도 조승수 후보도 그걸 알고, 나도 알기 때문에 성사시킨 단일화다.

 

 

당부의 말씀

지금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장은 패배가 쓰라리고 패배의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승수 후보의 경선 승리는 그쪽이 잘하고, 내쪽에서는 못해서 합쳐진 필연의 결과입니다.

내가 실력도 운도 부족해서 졌음을 인정하고, 내가 못이룬 꿈을 조승수 후보가 대신 이룰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시민을 무시하는 새누리당의 오만함을 이대로 둘 수는 없지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