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정치/밥 일 꿈- 도전

날개없는 추락, 끝이 곧 반등의 시작...(1)

질고지놀이마당 2014. 6. 11. 01:10

 

선거 직후 연휴기간에 겪은 일이다.

울산에서 정년까지 남은 생활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막막한 가운데 대강의 밑그림은 그려졌다.

살림을 살 집을 마련할 길이 없으므로 아내는 아들이 선견지명(?)을 갖고 마련한 대부도 촌집으로 가고, 나는 독신자 숙소를 얻는 것으로.

 

그리하여 선거 마치고 현충일을 낀 3일간의 연휴기간에 아내가  가 있어야 할 촌집에 다니러 갔다.

촌집은 교통이며 생활 자체가 모두 불편함 그 자체여서 첫 날은 군포에 있는 처제 집에서 묵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처제 집을 나서는데 처제가 봉투 두개를 만들어서 아내와 나에게 각각 하나씩 건넨다.

이게 뭐냐고 손사레를 치니까 형부와 언니한테 마음먹고 주는 '용돈'이란다.

 

처제는 이혼을 하고 혼자서 생활을 한지가 꽤 오래됐다.

재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창 공부할 나이의 두 아들의 부양과 교육까지 책밈을 졌으므로 처제는 억척스럽게 일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처제에 비하면 우리부부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며 살았고, 아내는 곧잘 처제와 비교되는 '시집 잘 간' 언니였다.

처제도 일찍 결혼을 한 덕분에 우리 애들과 동갑내기인 두 아들도 다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처 조카인 처제의 두 아들은 혼자가 된 어머니가 얼마나 열심히 살면서 자신들의 뒷바라지를 했는지 알기에 어머니를 잘 모시는 효자들이다.

 

나는 한 때 처제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진보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결혼관에 대해서는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처제가 '이혼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한동안 어색하고 불편했던 것이다.

나보다 한살 위였던 손아래 동서가 속 많이 썩이고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왠만하면 참고 살지하는 마음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처럼 고루한 보수성을 다 버리긴 했지만 하여튼 내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어도 처제는 직감적으로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

 

제법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나는 처제의 이혼을 옳은 선택이었다고 받아들였고, 처제도 그제서야 형부에게 서운했던 점을 실토했다.

처제는 힘들게 일하면서 돈을 벌어서 생활하면서도 형제들에게 씀씀이는 우리 부부보다도 시원시원했다.

돈을 써야 할 때를 알고, 꼭 쓸 때는 아끼지 않는 처제가 참으로 대견스럽고 장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처제나 처조카들에게 베풀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처제는 어렴풋이 내가 처한 어려움을 헤아렸는지 봉투에 정성어린 마음을 담아서 건네온 것이다.

그것도 아내 몫까지 따로 챙겨서...

아내는 내 봉투에 얼마가 들었나 궁금해서 안달이었지만 촌집에 가서 텃밭을 일구고 울산으로 내려 올 때까지 처제가 담은 마음의 무게를 차마 열어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오늘 아침 확인을 했더니 일금 50만원!

밤낮 가리지 않고 힘들게 일하는 처제의 처지를 감안하면 그 돈의 무게는 동그라미 하나를 더 붙여도 부족할만큼의 큰 값어치를 지닌다.

 

내 잘못으로 내 주변의 가장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지는 빚이 너무나 크다.

정치적 파산이야 정치 안하면 그만인데 경제적 파산은 나혼자만의 불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어서 더욱 마음이 무겁다.

이 추락의 끝이 어디일지 모르지만 갈데까지 가보자.

 

어릴적 미역을 감다가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때 당황스럽고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공포감에 허우적 거리기 보다는 차라리 자맥질을 해서 깊이를 가늠하고, 바닥을 찍는 반력으로 솟아 올라 위기를 넘겼던 기억이 있다.

날개없는 추락을 두려워하기 보다 바닥을 찍으면 더 떨어질 곳이 없으므로 다시 솟아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