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진(記)/국외여행

역사기행-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찾아서

질고지놀이마당 2018. 9. 15. 22:21

2018. 9. 6 목 출국 인천~장춘~길림

9. 7. 금. 맑음 길림~용정~중-조국경~청산리 전투현장~이도백하


'6월의울산사람들'과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찾아서 떠난 역사기행

연변조선족 자치주 룡정시에 있는 일송정과 혜란강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용정 중학교, 그리고 생가방문


13;20분에 출발하는 항공편(중국 남방항공)이 연착 또 연착 되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면서 맞은 황혼

6시간 넘게 지연된 19시 10분에서야 탑승을 시작했으니 이날 모든 일정은 뒤죽박죽 멘붕상태가 되었다.~ㅠㅠ

어디 일정뿐이랴, 숙소 식당 교통편 모두 바꾸고 또 바꾸고 20명이나 되는 대가족 자유여행 인솔책임을 맡으신 목사님 속내는 검게 탔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목사님의 사전 예방주사 인도를 받아서 '아~재밌다' 라고 자기최면을 통해 즐겁게(?) 극복했다.

항공사에서 승객들에게 취한 '보상(?)' 조치는 장춘공항에 내려서 중국화폐로 현금 200원씩 지급~@@






길림시에서 맞은 일출

여행을 떠나면 '잠자는 시간도 아까운' 성격이라서 간밤에 자정넘어 호텔에 도착했으면서도 새벽같이 산책을 나섰다.

지도를 구하지 못했지만 어림짐작으로 길림시를 가로지르는 송화강이 숙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을 것 같아서 방향만 잡고 걸었는데 과연 그러했다.









강변에 조성된 공원 곳고에서 새벽을 여는 사람들



유물전시이긴 하지만 강변공원에 왠 대포와 탱크를??







친환경적인 고기잡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찾아서 용정으로 가는 길

시원스럽게 뚫린 고속도로는 차가 별로 없어서 한적하였고, 길가에는 가는 내내 끝없는 옥수수밭으로 이어졌다.

중국인들에게 옥수수는 튀김용 기름과 주식의 원천이며 옥수수대는 땔감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광활한 만주벌판을 달리는 차안에서 우리는 목사님으로부터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역사강의를 들었다.

몽골에서도 오래 거주하시면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셨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목사님은 시인이자 문학과 역사에도 전문지시식을 갖추고 계셨다.

유목민족답게 빠른 기동력을 무기로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제국은 그러나 왜 2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을까?


목사님은 그 이유를 몽골이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고유문화가 없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재주는 탁월했으나 고유문자도 없고, 고유 전통문화도 없었다는 것,

몽골대학에서 교수 학생들이 모인 강연회에서 이러한 내용으로 열강을 함으로써 몽골 지식인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사례도 함께 소개하셨다.

듣고보니 과연 그런 것 같다.




역사기행의 취지에 맞추어서 방문하는 곳에 대한 사전 강의를 들으면서

평야지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험준한 산악도 아닌 구릉지대가 펼쳐진 들판을 3시간 넘게 달려서 룡정시로 들어섰다.

독립운동가들이 비밀결사모임을 가졌던 일송정과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학교와 생가를 방문하기 위해서다.


일송정이 위치한 비암산 풍경구동산에 세워진 기념비

그러나 중국 당국은 대한민국 해병전우회에서 세웠다는 시비에 세겨진 글을 깎아내고 생뚱맞은 글을 새겨놓았다고 했다.

옆에 세워진 시비를 살펴보니 과연 표면을 한번 깎아낸 흔적이 있었다.


역사기행 첫 일정인 일송정 입구에서 우리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실망감부터 맛보았다.

우리에겐 선열들의 비장한 독립운동의 현장이기에 엄숙하 마음으로 불원천리 찾아온 것인데 이곳의 분위기는 상업적으로 포장된 유원지로 바뀌어 있었다.



일송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룡정시내와 혜란강

혜란강은 룡정시내를 가로질러서 일송정이 있는 비암산을 휘돌아 평야지대로 흐른다.





큰 주차장을 만들어 놓고 입장료와 셔틀버스 승차료를 받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송정 오르는 길가에 조성된 꽃밭과 조형물들은 이 역사적인 장소와 전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수준도 유치하고 조잡했다.


우리 일행을 인솔하시는 원로 목사님 말씀에 따르면 지금 조성된 꽃밭일대는 독립투쟁 전투에서 산화해간 독립운동가들의 묘가 상당히 많았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다음으로 찾아간 룡정중학교 정문에서 우리 일행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우리에게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학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학교로 일려진 학교(당시에는 대성중학)로 알려져 있었는데 현지 분위기는 영 아니었다.

교정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윤동주 시인의 흉상, 시비, 기념관을 둘러 볼 예정이었으나 정문에서 통제당했다.

그 이유가 뭘까?

목사님 설명에 따르면 중국정부가 추진하는 '동북공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교문 왼편에 새겨진 '별빛 찬란한 민족학교'라는 이름이 무색해지는,

아니 저 간판도 떼어지는 것 아닐까? 참담한 기분을 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용정중학교에서 당한 꿀꿀한 기분을 다음 방문지인 윤동주 생가에서 어느정도 보상받은 기분이다.

길가에 우뚝 세워진 생가 비석을 시작으로 생가는 잘 보존 및 관리되고 있었다.

때맞춰 피어난 코스모스와 맑고 파아란 하늘빛도 생가의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윤동주 시인하면 가장먼저 떠오르는 서시와 흉상이 새겨진 시비 앞에서 우리 일행은 줄을 서서 개인 인증샷을 다 찍었다.

넓은 생가터 곳곳에는 시인의 작품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고, 한켠에는 단아한 기품의 팔작지붕 한옥으로 지어진 기념관이 있다. 













북한은 만주벌판 곳곳에 항일투쟁 유적지에 혁명열사기념비를 세워놓았다.

그런데 김좌진 장군이 대승을 거둔 청산리 전투현장은 남과북 어느쪽도 유적지로 보존하는 노력이 없었다고 한다.



인솔대표이신 목사님의 안내로 회령시가 한눈에 보이는 조망터를 찾아 중-조 국경으로 갔으나 국경검문소의 불허로 또 길이 막혔다.

대신에 이도백하로 가는 길을 한참 돌아가는 것을 감수하고 청산리대첩 전적지를 찾아갔다.

편한 고속(전용?)도로를 놔두고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어서 발 아래 긴 협곡이 청산리 대첩을 이룬 현장이라고 설명하시는 원로목사님

그런데 전적지 안내는 물론 표지판 하나도 세워놓지 않았으니 도대체 남북한 당국은 뭐하는지 모르겠다고 열변을 토하신다.






이도백하로 가는 길목에서 딱 한번 저멀리 구름에 가려진 백두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도백하에서 여장을 푼다음 저녁식사는 백두산 자락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서 조선족 교포가 정성껏 준비한 우리토종음식으로~

이 또한 목사님께서 맺어놓으신 개인 인맥이 있었기에 가능한 잊지못할 감동이자 추억만들기 시간이었다.


현지 쇠고기로 요리한 숯불구이와 육회

사료먹여서 키운 육우가 아닌 재래식 풀을 먹여 키운 소라고 하는데 길들여진 우리 입맛에는 육질이 질겼다.




쇠고기 요리 외에 백두산 산나물과 채소, 전통방식의 두부와 된장 국, 옥수수, 돼지고기 수육

그리고 한국에서 공수해 온 참이슬과 현지교포가 직접 담근 들쭉술을 반주로 곁들인 럭셔리한 식사였다.

어느정도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각자 자기소개와 역사기행에 참가한 동기 및 소감, 그리고 직녀에게 및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을 합창했다.


백두산 자락 산골마을의 밤은 불을 끄면 옆에서 코를 베어가도 모를 정도로 칠흙같은 어둠이었다.

어둠에 비례해서 하늘에는 쏟아질듯 무수한 별이 반짝였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탄성소리~!!

태고적 하늘이 이랬을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찾아서 떠나온 역사기행에서 백두산에 와서야 비로소 별을 제대로 만났다.

일행이 합창과 여흥을 즐기는 동안에 슬며시 어둠속으로 스며들어서 밤하늘을 담아 보았다.

삼각대와 릴리즈가 없기때문에 타이머를 활용하여 여러번 시도끝에 겨우 한 컷을 담았다.^^*


직녀에게 - <문병란 시/박문옥 작곡/김원중 노래>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은하수 건너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연인아 연인아 이별은 끝나야 한다 

슬픔은 끝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