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산행기/백두 한라 지리 설악 덕유산

직원들과 함께 한 지리산 종주 연수기

질고지놀이마당 2007. 5. 10. 17:17


 

각별한 의미로 자리하는 지리산

지리산을 떠 올리면 나는 특별한 감상에 젖어든다.
높이(1915m)는 한라산 다음이요, 아름다운 풍광은 설악산 뒷줄이지만 반으로 잘린 한반도 남쪽을 대표하는 산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지리산을 꼽을 것이다.

사실 지리산은 민둥산 같은 육산이라서 산세나 경관은 그리 빼어나지 않다.
그럼에도 지리산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산세의 웅장함과 현대사의 비극을 온 몸으로 겪으면서 또한 그 아픔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조정래 작가가 쓴 역사소설 '태백산맥'과 이태 작가의 자전적 실화소설인 '남부군'에는 지리산 일대에서 활약하던 빨치산의 일대기가 생생하고도 처절하게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남부군'은 책을 쓴 작가(이태) 자신이 빨치산의 일원으로서 기록을 담당했었기 때문에 실화에 근거한 사실적 묘사가 현실감을 더해 준다.
'남부군'을 읽을 때 소설속의 무대가 어느 능선, 어느 골짜기였는지 지리산 지도를 펼쳐놓고 대조해 가면서 꼼꼼히 확인하던 기억이 새롭다.

따라서 지리산 산행을 갈 때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지명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고 빨치산의 활동 및 공비 토벌과 관련한 장면들이 오버랩 된다.
살을 에는 엄동설한에 추위를 가릴 방한복이나 방한화는 고사하고 생명을 유지할 식량조차 없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토벌대에 짐승처럼 쫓기던 생활을 7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였던 이현상이 사살되었다는 명선봉 근처는 물론 망망대해처럼 넓디넓은 능선과 계곡에는 온전히 눈감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간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을 터이다.
좌우 극단적인 편 가름 속에 낮에는 국방군 밤에는 빨치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이 겪었던 수난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전몰군경 및 그 유족들의 아픔은 또 얼마나 큰 것인가!

아직도 아물지 못한 현대사의 아프고도 슬픈 역사를 간직한 지리산인지라 현대화된 장비로 무장하고 먹고 마실 것을 충분히 갖추어 취미생활로 찾아가는 산행이 너무 호사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겸손한 마음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

어느 산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지리산은 특히 인간에게 겸손함을 가르치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한다.
내가 지금까지 지리산에 등산을 간 것은 대략 10여회쯤으로 기억된다.
뱀사골계곡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한신계곡 등을 통해 반야봉이나 천왕봉, 그리고 화엄사에서 노고단 등을 올랐는데 종주개념의 산행은 딱 한번 있었다.

산청군 유평리 대원사에서 출발하여 치밭목 산장~써리봉~중봉~천왕봉에 오른 후 노고단에서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2박 3일간 종주한 것이 95년 봄이었다.

그런데 지리산 남쪽에서 오르는 코스는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더 많다.
그리고 오르는 코스는 물론, 계절에 따라서도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난 아직 지리산을 제대로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산을 찾으면서, 특히 명산을 오르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겸손함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현대문명이 발달했어도 산에서 갑자기 변화무쌍한 날씨를 만나게 되면 자연 속에서의 인간이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인가를 느끼게 된다.  

이번 북구청 직원들과의 종주과정도 그랬다.
둘째 날 점심 무렵부터 흐려지기 시작한 날씨는 안개구름과 거센 바람이 일행을 괴롭혔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여 세석 대피소로 가는 내내 시계(視界)는 50~100m 미만, 바람은 몇 걸음씩 옆으로 물러날 정도로 세차게 불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는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여직원들이 불안해서 화장실 가기를 꺼릴 정도였다.
게다가 세석 대피소에 도착할 즈음에는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서 불안감을 느낀 직원들이 내일 일정을 변경해서 바로 하산하기를 바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처럼 깊은 산중에서 주변 상황도 모르고 심지어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공포감은 배가된다.
이는 마치 수영을 할 때 물속을 훤히 볼 수 있으면 안심이 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이 더 커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보조를 맞추기 위해 천천히 걷는 것도 극기

나는 솔직히 시간만 허락한다면 1기부터 3기까지 매번 종주를 따라가고 싶었다.
산을 걷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공직에 있다보니 취미생활을 할 여건이 어렵기 때문이다.
일정과 코스를 보니 마음 같아서는 하루 만에 주파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지만 직원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연수라 천천히 가는 것에 익숙해지기로 작정하고 짐을 좀 더 무겁게 짐으로써 보조를 맞추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번 종주는 직원들의 연수지만 특별히(?) 아내를 참가시켜 동행을 하였다.
규정에 어긋난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아내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너무 없다보니까 고행길이나마 같이 하고 싶어서 욕심을 낸 것이다.
마음 한편으로 평소 아내의 걷기 실력을 알기 때문에 그 정도면 적어도 전체 일정에 민폐는 끼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깔려 있었다.
어쨌든 아내는 내내 잘 걸어 주었고, 우리 팀(9조) 11명의 조원들은 4명의 여직원 모두를 포함 '아줌마'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팀원 모두 거뜬하게 완주를 하였다.

평사리 최참판 화엄사 탐방

첫날(5. 16 갬)은  시간 여유가 있다고 해서 도시건설국장의 제안으로 박경리 작가님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 고가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안방드라마로 방영 중이어서 세트장으로 사용되기도 하기에 마을 전체가 관광명소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최 참판이 기거하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주변을 둘러 싼 집들의 규모나 위치로 인해 대감마님 댁의 위엄을 더하고 있었다.
봉건시대의 상징이 그대로 남아있는 저택과 마을 구조는 사랑채 및 가장 가까운 집에는 집사와 마름들이 살았을 것이고, 그 아래는 하인이나 소작농들이 살았을 터이다.

드넓은 들판을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백성 위에 군림하던 고관대작의 위세와 나라가 망하듯 몰락의 길을 걸었던 사대부 양반가의 모습을 상상하노라니 옛 속담에 '부자 3대가기 어렵다'는 말이 떠오른다.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생긴 모양대로 돌담을 쌓아 경계를 짓고, 대를 이어 살아왔을 민초들의 초가집 담장과 장독대마다에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이다.

화엄사 입구 주차장에서 점심식사를 한 다음 화엄사 경내를 돌아 볼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여러 차례 가 본 곳이라 새삼스러움이 없지만 각황전이나 각황전 앞의 석등은 국보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재다.

이렇듯 화엄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신라로 바뀌기도 하는 등 1600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로서 국보와 보물 10여점의 귀중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서 승보사찰인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그런데 3백장 이상 찍을 수 있으니 3일 동안 문제없다고 장담을 하던 카메라가 벌써 배터리 수명이 다 됐다는 것이다.
산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이런 낭패스러운 일이...!
마침 같은 9조에 속한 '오서방'(오세천 주사)이 성능 좋은 디카를 갖고 있다기에 권력형 압력(?)을 행사하여 강제 징발을 했다.

노고단까지의 몸 풀기 산행

화엄사 경내 탐방을 마치고 성삼재까지 차로 이동한 다음, 대열을 지어 노고단 대피소까지의 행군은 고작 1시간 남짓한 몸 풀기 수준이다.
태극기를 앞세운 행군대열이 보기에도 절도 있어 보인다.

다들 이까짓 것쯤이야 하는 얼굴인데 아직 짐이 잔뜩 들어있기 때문에 불과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땀을 비 오듯 쏟으며 휴식이다.
유심히 살펴보니 벌써 힘들어하는 직원이 포착된다.

출발당시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직원 두 명은 잘 버티는데 전혀 엉뚱한 직원이다.
첫날이야 거리가 짧으니까 괜찮겠지만 낙오자가 생긴다면 필시 영순위일 터.
중점 관리 대상인 셈이다.

노고단 대피소에서의 저녁 시간도 여유롭기만 하다.
팀별로 준비한 저녁 메뉴가 다양해서 하나씩만 맛을 봐도 진수성찬이다.
술도 한잔씩 나누면서 마치 소풍 나온 기분에 젖어든다.
날씨가 좋으면 노고단에서 보는 저녁노을도 일품이련만 애석하게도 옅은 구름 탓에 흐릿한 해무리로 아쉬움을 달랜다.

잠시 모여 참가자 소개와 진행 팀에서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마치고 내일의 강행군을 위해 강제취침을 명받은 시간은 8시 40분.
그러나 초저녁인데다 피곤하게 걷지도 않았으니 쉬이 잠이 올 리가 없다.

통행로 공간을 사이에 두고 머리를 맞대는 형태로 한 방에 누운 선남선녀들인지라 봉숭아 학당과 다름없는 분위기가 한동안 연출된다.

난 특별히 준비해 온 과일주를 한잔씩 권하는 것으로 여직원들의 편안한 숙면을 권했건만 짓궂기 그지없는 아무개 담당의 익살로 약효를 못보고 말았다.

안개구름과 강풍속의 강행군 - 노고단에서 세석까지

둘째 날(5. 17 흐리고 비, 강풍)도 오전까지는 적당한 바람과 옅은 구름으로 인해 걷기에는 그저 그만인 날씨였다.
아직 어둑한 시간인 4시 30분에 기상하여 부산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출발한 시각은 5시 50분. 이후 대략 1시간 걷고 10~15분 쉬는 형태의 행군이 이어졌다.

노고단 돌탑 부근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임걸령~삼도봉~토끼봉~총각샘을 거쳐 연하천 산장에 11시 30분경에 도착했다.
여기서 대부분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출발하는데 날씨가 심상치 않다.
짙은 안개구름으로 시계(視界)는 가려지고 세찬 바람에 밀려 중심을 잃고 몇 걸음씩 밀려날 정도다.

그렇게 강풍에 시달리며 안개구름을 뚫고 벽소령 대피소까지 두 시간을 걸었다.
직원들의 얼굴에서 지쳐하는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된 두 명의 직원은 진작부터 배낭을 넘기고도 한참을 쳐진다.
벽소령 대피소는 골바람이 불어오는 능선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람을 맞으며 서 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화장실이 괜찮게 갖춰져 있건만 여직원들은 바람에 날려갈까 불안해서 화장실을 못가겠다고 포기할 정도였다.
얼마간의 휴식을 마치고 출발하는 직원들의 표정에는 비장감이 서린다.

어쨌거나 오늘의 숙소인 세석대피소까지 자기 몸은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선비샘~칠선봉을 거쳐 영신봉으로 오를 무렵부터 그동안 참아 주었던 빗방울이 날리기 시작한다.

영신봉으로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잘 만들어져 있는데 이미 지치기 시작한 직원들에게는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천만근 무거워 보인다.
이윽고 세석 대피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점에 이르자 설상가상으로 간간이 날리던 빗방울이 빗줄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긴 이만큼 비를 참아 준 것만도 커다란 축복이었다.

이제 내리막길 7백m를 남긴 지점에서 후미가 걱정되어 알아보니 아직 칠선봉도 훨씬 못 왔다고 한다.
정상인도 한 시간 이상 쳐진 거리니까 지친 몸으로는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비는 내리고, 곧 어둠이 내리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팀원들에게 짐을 맡기고 뛰다시피 온 길을 되짚어갔다.

극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뜨거운 동료애

그러나 지나친 걱정이었다.
비록 지쳐서 걸음 속도는 늦지만 뒤쳐진 두 명의 직원이 속한 팀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역할을 나누어 잘 인도해서 오고 있었다.
아, 이래서 팀 중심의 연수가 중요하구나!

이런 팀웍과 동료애야말로 이번 종주산행의 가장 소중한 성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지칠만한 시간이었지만 맨 후미 팀으로부터 배낭을 넘겨받아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세석 대피소에서의 저녁은 비바람과 안개 때문에 좁은 취사장에서 취사와 식사를 해결하려니 그야말로 난민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이런 악천후라면 내일 일정대로의 진행이 무리가 아니냐는 걱정스런 눈빛이었지만 나는 내심 중간에 포기하거나 코스를 바꾸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내일 일어나보고 결정하자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이윽고 뒤에 쳐졌던 꼴찌 팀이 도착하자 직원들은 와하는 함성과 박수로 격려했다.
안도감과 함께 따뜻한 식사와 술잔을 나누는 정담 속에 둘째 날을 무사히 마쳤다.

악천후 속에서의 강행군

셋째 날(5.18 비오고 오후 갬) 4시 20분에 기상, 날씨가 전혀 좋아지지 않아서 걱정이다.
하지만 목표를 수정할 생각은 없었는데 진행팀도 마찬가지 의견이었다.
다만 비가 내리는데 행군을 하다가 아침을 지으려면 너무 번거롭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지어먹고 출발하기로 하였다.
이른 아침 준비하느라 부지런을 떨었는데도 식사를 마치고 비옷으로 무장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려서 아침 6시 25분에야 세석 대피소를 출발했다.

대부분 일회용 하얀 비옷을 걸쳤기 때문에 마치 힌 상복을 입은 대열처럼 처연하고도 비장함을 자아낸다.
어제 뒤로 쳐졌던 두 직원이 속한 팀을 선발로 세웠다.
밤새 휴식의 덕분으로 아침에는 제법 생기를 찾은 모습이어서 다소 안심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촛대봉에서 일출을 보아야 하는데 일출은 고사하고 50m 정도의 시야도 확보하기 어렵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촛대봉을 지나는데 주변 경관을 전혀 볼 수 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진을 찍어도 열사람 뒤쪽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렇게 장터목 대피소까지 안개구름 속에서 거닐었으니 신선놀음인 셈이다.

구름 걷힌 천왕봉의 비경- 민족의 기상이 발원한 곳

장터목 대피소에서 얼마간의 휴식을 취하는데 힘들어하는 직원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천왕봉 정상까지 이제 한 시간만 걸으면 된다는 말로 힘을 북돋운다.
제석봉 일대의 고사목 지대를 지나는데 그간의 세월 속에 고사목들도 거의 다 흙으로 돌아가고 그 자리를 물려받은 어린 묘목들이 안쓰럽게 비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저 어린 것들이 숲을 이루려면 얼마나 긴 세월을 기다려야 할 것인지...?
누군가의 잘못으로 일어난 산불로 폐허가 된 숲이 제 모습대로 복원되기까지는 거의 한 세기의 세월과 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제석봉의 폐허를 보면서 무룡산에 큰 산불이 일어나 처참하게 타버린 흉측한 나무의 잔해들이 생각났다.

드디어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을 지나고 암릉 지대만 오르면 정상이다.
힘들어하던 직원들도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자 활기를 띤다.
이즈음 참으로 놀랍게도 날씨가 개이고 있었다.
잠깐씩 안개구름이 걷히면서 순간순간 산자락이 보이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때때로 파란 하늘이 나타나기도 하질 않는가!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즈음 자연이 연출하는 천왕봉의 경관은 경탄 그 자체였다.
지리산 산신령이 있어 힘들게 올라온 북구청 직원들의 노력에 보상해 주기라도 하듯 푸른   창공과 하얀 뭉게구름바다와 망망대해 같은 녹색으로 물들은 지리산의 웅장한 산세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자 모두들 그간의 피로를 다 잊는 듯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호 통제라!
징발한 카메라조차 배터리가 소진되어 아름다움 풍광을 담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담에 땡빚을 내서라도 괜찮은 디카를 사야겠다.

아쉽고도 지루한 하산 길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웅장한 지리산의 장쾌함에 언제까지 취해 있을 수는 없는 일.
약식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자신과 북구 발전을 기원하는 만세삼창을 부르고,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기념촬영 후에는 서둘러 하산길이다.

힘들게 오른 것이 아깝고, 아름다운 풍광이 내내 아쉬움을 더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다시 내려와야 하는 것은 인생항로와 같은 이치.
날씨는 이제 완전히 개어서 하늘은 푸르다 못해 쪽빛이다.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구름은 온갖 형태를 연출하여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내려오는 길에 짬을 내어 법계사에 올라보니 탁 트인 경관이며 절집 앉은 자리가 문외한이 보기에도 틀림없는 명당이다.
불상대신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 참배하면서 일행의 무사하산을 기원했다.
절집주변으로 활짝 핀 금낭화 군락이며, 법당 뒤편 바위에 동그마니 깍아 세운 3층 석탑의 절묘한 배치를 보니 카메라 없음이 또 한번 아쉬움으로 남는다.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날듯이 내려오니 때마침 멀지 않은 곳에 휴식을 취하고 있기에 포토 박을 동행하여 다시 법계사로 올라가 담고 싶었던 장면을 대신 찍는 억척을 부렸다.

이어지는 하산 길은 가파른 칼바위능선을 피해 완만한 계곡으로 우회하는 길을 택하는 바람에 더 지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전원이 정상을 밟았으니 목표는 달성했고, 설사 내리막길이 지루하더라도 부상자가 생기지 않는 한 낙오할 걱정은 덜었으니 안심이었다.

종주를 마치며

중산리 입산통제소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겸해 하산주(酒를) 나누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 격려하는 시간은 마치 승리의 축배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술기운과 분위기에 취해 2박 3일간 지나 온 여정이 영상필름처럼 떠오른다.

느끼는 감동의 크기는 각자의 마음가짐이나 체력조건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평생 동안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산행을 한 직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주치는 직원들 얼굴에서는 원망이나 피곤한 기색보다 마침내 해냈다는 자부심이랄까 자신감이 피어난다.

비로소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이 완주했다는 기쁨과 안도감이 밀려온다.
2박 3일 동안 산속에서 줄곧 걷기만 하는 것이 전부인 종주산행이라서 일견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연수프로그램이었지만 현대의 물질문명이 주는 편리함을 가능한 사양하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공존하는 삶과 극기의 시간을 가진 것 자체가 교육이고 훈련이었다.
온 몸으로 극한상황을 체험하는 가운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상을 그려보면서 자연과 동료와 하나 되는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