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정치/질고지칼럼

12. 찻잔 하나를 씻는 마음

질고지놀이마당 2008. 6. 19. 14:49

관리자 (2004-07-08 11:12:27, Hit : 305, Vote :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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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찻잔 하나를 씻는 마음


    

지난 주 북구청 내부게시판에 자기 컵 쓰기에 대한 글 한 꼭지가 잔잔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어느 여직원이 첫 글을 올렸는데 일회용 컵 사용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였습니다.

이런 글이 올라 온 계기는 지방 신문이 보도한 일회용품 사용을 규제하고 단속해야 할 관공서에서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기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다른 행정기관을 비판하면서 북구청 직원들은 모범적으로 실천한다고 대비를 시켰습니다.

문제를 제기한 직원은 과연 우리가 그런 칭찬을 받을 만큼 잘 실천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성찰과 함께 아직도 찻잔은 여직원이 씻어야 한다는 편견이 존재하는 사무실 분위기에 대한 지적을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보면서 나부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침 신문을 보면서 북구청에 대한 칭찬에 흐뭇한 생각만 앞섰지, 정말 칭찬을 받을 만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혹시라도 아직도 남성 편의적인 분위기에 억눌려 상처받는 여직원은 없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한편, 문제를 제기한 여직원의 용기와 그 방법이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개는 자기 주장만을 강조하느라 남의 입장을 간과하기 쉬운데 이 글에서는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세심한 배려를 바탕에 깔면서 공동체 내부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을 함께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도 자기 컵 갖기를 생활화하고 자기 컵은 자기가 씻기로 하자는 것을 다시 한번 제안하면서 직무상 불가피하게 손님 접대가 많은 간부 공무원의 경우는 현실적인 대책을 강구해 보자는 의견을 올렸습니다.
구청에서 가장 연장자이신 총무국장님도 여직원에게 "박OO 내 컵도 주세요, 그동안 미안 했어유" 라는 유머스런 글로 마음을 표현했더군요.
이와 같은 작은 반향이 글을 올린 여직원은 물론, 내색은 안 했어도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었을 더 많은 여직원들의 마음에 작으나마 위로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직원이 올린 한편의 글에 10여 편의 꼬리말이 달리면서 모아진 하나의 결론은 그래도 우리 북구청에는 일회용 컵을 쓰지 않기 위해서 집에서 가져 온 '전용 컵'을 쓰는 직원이 제법 많다는 사실 확인과, 앞으로 여직원에게 찻잔을 씻게 하지 말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주류였습니다.

마음 속으로 동의하든 안 하든 일단 북구청에서는 "자기 컵을 쓰자", "자기가 쓴 컵은 자신이 씻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구성원의 합의사항과 같은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공론화의 과정이었습니다.

이렇듯 살 맛 나는 북구, 일할 맛 나는 직장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부당함을 참고 속으로 삭이기보다는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기하고, 이를 보는 다른 구성원들이 대안을 제시하여 토론하는 가운데 공동의 해법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 흑백논리나 편가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 공동체의 체면과 단합을 해치지 않으려는 배려가 전제되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권위주의와 가부장적인 생각이 무의식을 지배하던 시절, 여직원은 심부름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자 미덕이고 남자 직원은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 마시던 풍토는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차는 자기가 타 마시면서도 찻잔을 씻는 것은 여직원에게 맡기는 현실은 아직도 우리 안에 무의식적인 차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시민 사회단체에서는 당연한 실천이 관공서에서는 작은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변화들이 희망이고 진보로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라 생각합니다.

차별을 없애려면 제도와 의식 둘 다를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의식 즉, 생각은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에 의식부터 바꾸어 나가면 제도는 따라서 바뀌게 됩니다.
거창하게 생각하기 쉬운 양성 평등의 실현은 사실은 마음 속의 생각을 바꾸고 작은 실천부터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쓴 찻잔 하나를 씻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공론화 과정을 통한 합의를 이룬 이후에 실천하는 마음에는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일회용품 안 쓰기 운동을 넘어 직장의 민주화와 양성평등의 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