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홈페이지에 연재했던 '질고지칼럼'을 블로그로 옮겨오는 작업중입니다. ^^*
꼬리말이 가장 많이 달렸을 정도(40여개)로 많은 이의 마음을 울렸던 이 글은 유난히 수난을 받는군요.
개인 홈페이지에서도 누군가의 실수로 날아 간 것을 겨우 복원했는데 다시 보따리 싸서 이사를 합니다.
◈ 마산 공원 묘지에 봄볕을 받으며 누워있는 경섭의 묘.
친구이자 동지인 경섭을 그리며
눈부시도록 화창한 봄날이건만 왠지 마음이 우울한 나날이었다. 아름다운 꽃을 보아도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 전에 서러움이고 슬픔으로 다가온다. 내 마음에 깃들어 있는 슬픔, 서러움 같은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린 것 같은 허전함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역시 모를 일이다.
그런데 지난 달 30일, 진해로 향하는 차 속에서 불현듯 생각이 났다. 봄을 심하게 타던 내가 잠시 다른 일에 얼이 팔려 봄을 타는 것조차 잊었던 것이었다. 아차, 그걸 잊고 있었다니!
4월을 일컬어 ‘잔인한 달’이라고 하듯이 격동의 현대사로 상징되는 ‘4월’의 의미 말고도 나에겐 개인적으로, 그리고 가정사적으로 매우 가슴 아픈 슬픔의 계절이다. 내가 죽음의 실체를 처음 접한 것은 국민학교 6학년인 13살 때다.
영민한 동생이라고 각별한 귀여움을 주고 훌륭히 키우려면 교육이라도 제대로 시켜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대들기도 하던 둘째 ‘웅’형님은 어느 봄날 홀연히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지병과 생활고 속에서 정작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했던 것일까...
뒷줄 오른쪽 세번째가 고 이경섭 동지, 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고 장항규 동지입니다. 장항규 동지는 98년 여름 정리해고 투쟁당시 농성장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났지요.
그 아픔이 채 아물기도 전에 청천 벽력같은 어머님의 갑작스런 죽음. 화사한 봄볕도 봄의 전령인 버들가지도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모두 슬픔이었다. 화사한 봄꽃도 서러움으로 다가왔다. 어떤 소리든 한숨이자 곡(哭) 소리요, 상여꾼의 북망가로 들리는 환청에 시달렸다. 내 나이 열다섯 소년시절의 봄은 그러했다.
봄에 찾아오는 슬픔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의 자리를 대신해 오시면서 부모님과 같았던 맏형님도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떠나셨다. 마침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막 이사를 한 터여서 형님은 새 차를 출고 할 겸, 동생 사는 모습도 볼 겸 울산으로 오시기로 한 전날이었다.
형님을 모시면 “아우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라고 기쁘게 해드리려는 찰나에 날아든 비보에 난 또 한번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었다.
내가 시의원으로 진출하던 98년 3월의 일이다. 그리고 친구이자 운동의 동지였던 경섭이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도 그보다 2년 앞선 96년 3월이다.
한 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진영 본가에 갔다가 밤을 도와 올라오면서 갓길에 주차된 트레일러를 추돌한, 졸음운전으 추정되는 사고였다. 이처럼 난 화사한 봄날에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일찍 떠나보냈다.
나보다 세 살 아래였던 경섭이는 성격이 활달해서 놀기 좋아하고 노래도 곧잘 불렀다. 눈을 지그시 감고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현장신문을 창간할 때 노동운동의 동지로 인연을 맺은 경섭이는 자기가 하는 일에 처음으로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며 매사 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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