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정치/질고지칼럼

46. 통일로 가는 오작교 3 / 박연폭포 외

질고지놀이마당 2008. 7. 9. 13:44

 

개성 시범관광 소개 마지막 순서는 박연폭포 및 후기입니다.(큰 사진은 옮기면서 추가했음)

 

 

 

 

 

  관리자 (2005-09-23 16:01:40, Hit : 665, Vote :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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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로 가는 오작교(3) - 송도삼절 박연폭포


박연폭포 모습, 좌측 너럭바위에 황진이가 썼다는 시가 새겨있다

점심을 마친 일행이 이어서 방문한 곳은 송도삼절로 유명한 박연폭포다.
개성시내에서 약 16km 떨어진 곳에 있어서 시내를 거쳐 잠시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타다가 다시 국도를 이용했다.

식사 후의 포만감과 긴장이 풀린 탓에 나른하니 잠이 스르르 오는 시간대였으나 창밖에 스치는 풍경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두 눈 부릅뜨고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이동 중에는 사진촬영을 못하게 해서 눈으로 보고 머리에 입력할 따름이다.
특이한 것은 가는 곳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군인들이 서 있는데 무엇을 위해 저 고생을 시키는지?
남측에서 간 손님들 신변보호 때문인지, 주민 접촉을 차단하기 위함인지 하여간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양방향 교행이 어려울 정도의 시골길을 달려 마침내 박연폭포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폭포까지 600~700m 쯤 될까?
완만하나마 오르막길을 걸어야 한다니 내심 바라던 바다.
걸어서 가는 것이라면 선착순 개념이니까 남보다 앞서 박연폭포를 볼 수 있는 조건이다.
평소 단련된 걷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나는 듯이 올라가니 과연 명성에 걸맞게 호방한 폭포가 펼쳐진다.

높다란 암벽에서 굉음을 내며 떨어지는 물줄기와 맑고 푸른 연못이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과연 신선들이 놀았음직하다.
폭포 아래 연못 주위로 꽤 널찍한 공터에 차려진 야외매장의 판매원들로부터 가장 먼저 환영인사를 받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어느 위치에서든 폭포 전경을 담기가 좋아서 본 대열이 도착하기 전에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송도삼절 박연폭포 화담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는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더불어 조선 3대 명폭 중의 하나이며, 각각 특색과 별칭이 있는데 구룡폭포는 성스러워서 '성폭' 대승폭포는 신비로워서 '신폭' 박연폭포는 신선이 놀만큼 아름다워서 '선폭'으로 불린다고 했다.
또한, 박연폭포는 폭포 아래 너럭바위에서 시와 사랑을 노래했다는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3절로 불린다.

너럭바위에 폭포 아래 황진이의 머릿결로 써서 새겨놓은 시구가 있다기에 냉큼 달려갔더니 과연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초서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하지만 구도와 빛의 방향을 가늠하는 사이 너도나도 건너오는 바람에 사진으로 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탐방객 대열이 도착하자 드넓던 폭포 주위가 꽉 차는 느낌이다.
풍광에 취해 사진 찍는데 여념이 없다보니 아내와도 떨어지고, 머슴골 일행도 뿔뿔이 흩어져서 변변한 단체사진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박연폭포를 내려오기 직전까지 남은  머슴골 회원들과 기념 촬영

천마산 - 성거산 이은 대흥산성

이어서 폭포 오른쪽으로 계단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있는데 천마산과 성거산을 따라 축성된 대흥산성이 있고, 관음사와 대흥사가 있다고 했다.
돌을 깎아 잘 다듬은, 비교적 가파른 계단을 10분쯤 오르니 대흥산성 북문이 나타나는데 이곳에서 조금 내려간 왼쪽 계곡이 폭포 상류다.

커다란 조롱박 모양으로 파인 바위 가운데로 직경 8m 정도의 연못이 만들어져 있는데 한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돌이 자리하고 있어 맷돌 같은 느낌을 준다.
일반적으로 아래쪽의 직경 30~40m에 이르는 큰 연못이 박연이려니 생각하기 쉬운데 밑에 연못은 고모담(姑姆潭)이라 부르고 위의 작은 연못이 박연이었다.

고개를 들어 북문 쪽을 보니 커다란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조선의 어머니'라는 글이 있었다.
내용인즉 강반석(김일성 주석의 어머니?)을 찬양하는 글이었다.

폭포 위 작은 연못인 '박연'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를 찬양하는 글이 바위에 큼직하게 쓰여있다

당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 구호

여기서 약 1.5km 거리에 관음사 절까지 개방되어 있었는데 대개의 탐방객들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일부만 계곡을 따라 올랐다.
필자가 거기에 빠질 수 없음은 당연한 일, 국민학교 다닐 적에 북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배웠으므로 북측의 사찰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계곡을 따라 잘 정비된 길을 오르는 동안은 그냥 동네 산사를 방문하듯 전혀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건너다보이는 산중턱 커다란 바위에 위압적일 정도의 크기로 새겨진 '김일성 동지 만세' '조선노동당 만세'와 같은 구호가 있어 이곳이 북측임을 실감케 한다.
오가며 풍경사진을 찍느라 자꾸만 지체되는 시간을 빠른 걸음으로 보충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유사시에 커다란 장점이다.


이런 구호를 거부감이나 제약 없이 소개할 수 있는 자체가 큰 변화다


잘 보존된 고찰 관음사 및 석탑

천마산~성거산의 웅장한 산세가 병풍처럼 둘러 친 곳에 호젓하게 자리잡은 관음사는 우리 북구에 있는 낙서암 정도의 아담한 사찰이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에서는 영겁과도 같은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반면, 건물 외부는 물론 부처님을 모신 내부의 단청과 법당 아래 요사채도 깨끗하여 전체적으로 단아한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느낌이 드는 고찰 관음사

절로 들어서는 초입에 푸른 이끼를 덮어 쓴 채 거북이 등을 타고 동그마니 서있는 비석이 눈길을 끌기에 살펴보니 아무런 설명이 없어 그저 오래된 무명탑이거니 상상하면서 천마산으로 추측되는 봉우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남겨 기억할 따름이다.


단청이 잘 보존된 대웅전 내부와 관음사 입구에 서있는 무명탑


박연폭포 아래서의 조촐한 '회갑연'

하나라도 더 챙겨보고 사진을 찍는 사이 일행이 다 내려가고 없어 달음질치듯 폭포로 내려오니 흩어졌던 머슴골 회원들이 조촐한 술자리를 하고 있었다.
마침 회갑을 맞은 임수진 진안 군수님을 위해 박연폭포 아래서의 즉석 축하연이었으니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겠다 싶어서 또 한 장 찰카닥.

맥주와 부침개, 더덕구이 등을 현장에서 조리해서 팔고 있었는데 이런 풍경은 북측에서나 즐길 수 있는 여유이리라.
그러나 한편으로 고려박물관과 선죽교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개성의 역사유물이나 명승고적에 대한 관리 및 통제가 좀 느슨한 것 같았다.

박연폭포 아래서 가진 임수진 진안군수님 회갑축하연

개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공식 관광일정을 다 마친 까닭에 보다 여유로웠다.
전형적인 시골풍경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시절 고향마을을 연상케 한다.
포장이 안 된 신작로에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과
들녘에 엎드려 일하고 있는 농부들 사이로 소를 이용한 쟁기도 보인다.
아마 가을 배추모종을 심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웃통을 벗은 채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며, 하교 길에 동무들과 어울려 놀다가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보니 고향같은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반세기가 넘는 단절의 세월이 만들어 놓은 어쩔 수 없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차이는 통일로 가는 길에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수없이 많구나 싶다.

치산치수, 식량, 에너지 사정 등 단편적으로 전해 들으면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상황들을 두루 목격하면서 깊은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차는 어느덧  개성으로 들어와 있었다.
개성관광 코스에는 고려의 시조인 왕건 왕릉과 31대 공민왕릉이 포함되어 있으나 하루에 다 돌아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박연폭포 코스와 둘 중에 선택이어서 이번 2차 시범관광단은 왕릉코스를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남행길로 접어들었다.

웅비의 나래 - 개성공업지구 건설

시내를 막 벗어나 시골인가 싶으면 곧바로 개성 공업지구 건설 현장으로 이어진다.
공업지구 견학은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우선 건설하여 몇 개 업체가 가동 중인 시범지구를 한 바퀴 빙 돌아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곳에서 느끼는 감회는 또 다르다.

잠자던 땅이 깨어나 지축을 울리며 웅비의 나래를 펴는 대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무려 2천만평의 공업지구가 조성되면 30만명의 인력이 필요하다니 개성은 북측의 경제발전을 선도함은 물론, 인민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가는 기관차 역할을 하리라.
40년 전 울산 공업단지가 건설될 무렵이 이렇지 않았을까!
그러한 대 역사가 남과 북의 협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누구라도 감개무량할 일이다.
이처럼 남북을 갈라놓았던 철조망에 길이 뚫리고, 다 방면에 걸쳐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곧 통일로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라 하겠다.

얼음이 녹아내긴 물방울이 모여 실개천이 되고 시냇물로, 강물로 모여 마침내 바다에서 만나듯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민족 통일로 가는 실개천은 이제 시냇물처럼 힘차게 흐르고 있다.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도처에 있어 돌아가고 쉬었다 갈지언정 그 흐름 자체는 이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인 셈이다.

그 역사의 현장에 함께 했다는 뿌듯함과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북측과 남측의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니 불과 하루의 여정이었음에도 무척 길게 느껴진다.

남에서 북으로 들어가는 관문 옆의 북방한계선 철조망.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낮으막한 봉우리가 도라산 전망대다.

남측 출입국관리사무소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