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정치/질고지칼럼

53. 장기근속 해외여행記/ 중국

질고지놀이마당 2008. 7. 9. 15:24

회사(현대자동차)에 복귀한 이후 운 좋게도 25년 근속자 포상휴가에 동행했던 기록입니다. ^^*

 

 

 

 

 

 

  홈지기 (2006-10-27 16:35:44, Hit : 865, Vote :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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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근속 해외여행기/ 중국 북경




사진위 :  만리장성 - 팔달령 부근
사진 아래 : 용경협

노사간 단체협약의 결과로 시행하는 25년 이상 장기 근속자를 대상으로 하는 부부동반 해외견학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3박4일간의 중국여행(중국이 아닌 북경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을 다녀왔다.
그간 해외 출장을 다닐 기회가 여러 번 있었어도 작년에 미국방문을 제외하고는 아내와는 함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은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없고, 심정적으로도 아주 편하게 아내에게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태국, 필리핀, 중국 세 곳 중에서 중국을 택한 이유는 중국은 워낙 넓은 나라여서 이후 언제든 기회가 있더라도 겹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중국여행 코스는 하반기부터 추가됐는데 신청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기 접수 받은 결과를 보고 인원이 미달된 3차에 끼어서 다녀왔다.

참가 인원은 22쌍 44명, 일정은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3박 4일간이었다.
방문일정은 23일 10시 문화회관 출발, 대구공항을 통해 13시 20분 발 대한항공 KE859편, 귀국은 26일 15시 40분(현지시간) 대한항공 KE860편이다.
비행시간은 약 2시간 남짓, 한국과 북경은 1시간의 시차가 있다.

3박 4일간의 장기근속휴가를 통해 보고 느낀 바를 소감을 정리해 소개 한다.


[첫날, 10월 23일(월) 맑음]

오후 14시 30분경에 북경공항에 도착했으나 입국 수속 및 짐 찾고 이동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리기 때문에 숙소로 가는 길에(?) 가볍게 들린 첫 방문지는 천단공원이다.
황제가 제사를 지내고, 역대 황제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니까 우리나라로 말하면 종묘에 해당하는 곳이다.
제사를 지내는 기년전(祈年殿) 건물은 원뿔형 건물인데 안에 네 개의 높다란 기둥이 지주로 세워진 목조건물로서 국보급에 해당하는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건축물들은 우리와 달리 재료가 석재이든 목재이든 표면처리를 해 놓아서 고풍스러운 건축미라든가 진귀한 문화재라는 실감이 나질 않는다.
다만, 크고 높고 넓은 규모의 웅장함이 보는 이를 압도할 따름이다.
어지간한 정보는 이미 알고 있는 현대에도 이러한데 그 옛날 동방의 작은 나라였던 고려나 조선에서 사신으로 원 명 청나라를 방문했던 사신들 눈에 비친 ‘대국’의 면모가 어떠했을까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황궁을 크고 화려하게 지은 이유 중에 하나가 황실의 위엄을 알리고 자기 나라가 세상의 중심임을 자처하면서 이웃나라들에게 위세를 통해 복종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저녁식사는 유명하다는 북경오리, 그러나 ‘맛은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가 생각난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서커스를 잘 한다는 조양극장으로 갔는데 여기도 만원사례다.
무대위에서는 박수가 절로 나올 만큼 고난도 공연을 하는데 연신 들락거리면서 자리를 찾아 앉고 나가는 객석 매너가 엉망이어서 산만하기 그지없다.  


[둘째 날, 10월 24일(화) 흐리고 갬]

아침부터 흐릿한 가운데 마치 스모그 현상처럼 시야가 좋지 않았다.
오전에는 천안문 광장으로 해서 자금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중국의 수도인 북경의 도로망은 잘 정비되어 있는데 별칭이 재미있다.
토지가 국가 소유인 사회주의 국가인데도 땅값이 비싼 곳은 천정부지여서 요지를 관통하는 순환도로에는 ‘금목걸이 도로’ ‘은목걸이 도로’라는 별칭이 붙여졌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도로정체가 심하고, 차 자전거 사람이 제멋대로여서 교통질서 수준은 이곳이 중국임을 실감나게 한다.
가이드가 우스개 말로 중국은 영어로 ‘차이나’로 표기되니까 한국과 차이나는 것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무질서 속의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 또한 중국이란다.

천안문 광장은 그 상징성과 현대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사건들로 인해 익숙한 장소인데 이른 아침인데도 족히 수 만명은 되어 보이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차와 인파가 넘쳐나서일까, 그리 넓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가장 많은 인파가 줄을 서 있는 곳이 눈길을 끄는데 바로 중국인들의 국부로 추앙받는 마오쪄뚱(모택동)의 시신을 안치한 곳을 찾는 참배관광객들로서 거의 다 중국인들이다.

지하통로를 통해서 천안문을 거쳐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조선의 궁궐에 비하면 상상을 하기 어려울만큼 규모가 크고 수많은 전각들로 구성된 자금성은 얼마나 많은 돈과 인력을 들였을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리고 왜 그렇게 크고 높고 넓고 화려한 황궁을 지어야 했을까도 의문이다.
그저 정복자로서 전리품을 가지고, 통치를 위한 자기과시의 수단이었을까?

오후에는 2002년 중국에 진출하여 짧은 기간 내에 고속성장하고 있는 '북경현대기차공사'를 방문했다.
공장 책임자로부터 개요 설명을 듣고 현장라인을 둘러보았는데 진출 4년 만에 30만대를 판매할만큼 급성장했다.
작년(2005년) 판매대수가 23만대, 최고의 인기차종은 아반떼(현지차명 엘란트라)인데 중국에서 판매되는 단일차종으로 2위라고 한다.
북경시내에서는 엘란트라 택시를 국내처럼 흔하게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공장 내부를 돌아보았는데 트럭공장을 사서 리모델링했는데도 공장이 깨끗하고, 정리정돈 잘되어 있으면서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음이 첫눈에 느껴졌다.
다품종을 동시에 투입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듈화 및 철저한 재고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가동율, 직행율도 높아서 우리가 방문한 당일 의장라인 복도에 설치된 전광판에 목표대비 현재 생산대수를 나타내는 가동률이 95~96%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현장 작업자 대부분이 20대 중반의 젊은 노동자들인데다 동종업종에서 처우수준이 좋은 편이라서 매우 선호하는 직장이라고 한다.

중국내에 공장을 지어 현지생산을 해야만 자동차 판매를 허용하는 중국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북경현대’를 설립하였는데 가장 늦게 진출했음에도 첫해 5만대, 이듬해 10만대, 3년차 23만대, 4년차 30만대 판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고속 성장을 하고 있어서 현재 30만대 생산규모의 2공장을 짓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북경현대’는 중국정부와 현대가 50 : 50의 지분으로 출자하였으며, 경영권도 공동이다.
중국 현지공장의 성공은 기쁘고 축하할 일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복잡 미묘하다.


[셋째 날, 10월 25일(수) 맑음]

가이드가 추울 것이라고 잔뜩 겁을 주어서 다들 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출발했는데 여행기간 중에서 날씨가 그중 좋았다.
아침 첫 일정은 명13능으로 가는 길에 옥(玉)공장 방문 일정이 들어있다.
난 처음에 입는 옷을 만드는 옷(衣服) 공장, 즉 봉제공장을 가는 줄로 알아들었는데 가서 보니 보석공장이어서 쓴 웃음이 나왔다.
중국인들의 상술은 실로 대단해서 명13능 입장권을 이곳에 들러야 할인을 해 준다는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같은 현상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여서 식당을 가도 판매장과 세트를 이루어서 매장을 거쳐 드나들도록 구조를 만들거나 화장실을 가더라도 판매대를 지나도록 한다.
백화점에서 약간의 공짜 선물로 아줌마 부대를 유인하는 것이나 화장실로 들어가는 길 좌우에 매장을 설치하는 고속도로 휴게소 구조가 중국에서 보고 닮아 가는 것이 아닐런지?

관광객을 실은 버스 수십 대가 이미 들어서 있고, 관광객들은 그저 가이드가 안내하는 대로 순한 양(봉)이 되어 믿고 따를 수밖에 없다.
거부감을 덜 주려고 그러는지 방문지에 따라서 ‘품질 보증권’ 혹은 ‘할인권’이란 표찰을 주는데 그건 단지 고객이 어느 여행사 소속이고 인솔자가 누구인가를 구분하는 목적이 더 큰 것 같다.
관광객들이 구입한 매출액의 얼마가 가이드 몫으로 건네진다는 것이 그 세계에서는 불문율일지 모르나 여행의 본말이 뒤바뀔 정도면 곤란한 일이다.

필자가 삐딱하게 보아서 그런지 정작 관광지에서는 시간을 빠듯하게 운영하면서 시간 늦지 않도록 단속하는 가이드가 쇼핑하는 곳에서는 관대하다.
이런 판에 박힌 안내 관광, 공짜관광이 싫으면 돈 모으고, 외국어 배워서 산에 다니듯 혼자 다니면 될 일이다.
아니면 쇼핑하라고 풀어놔도 안 사면 그만인데 사람들 심리가 그렇지 않다.
특히 외국여행이 처음이거나 기회가 적은 사람일수록 견물생심 마음이 동하게 되어있다.

명13능은 명나라 황제 13명의 능이 모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우리가 방문한 곳은 정릉으로서 명나라 13대 황제인 신종의 묘라고 한다.
이채로운 것은 48년이나 되는 재위기간동안 정사를 제대로 살핀 것이 없어서 능 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비석에 비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공덕비를 세웠으되 후세에 남길 공덕이 없어서 글이 없는 빈 비석만 세웠다고 하니까 참으로 통쾌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당시의 사가들은 역사 기록만큼은 정확하고 공정했나 보다.

생전에 한 일이라고는 주색잡기와 사후에 묻힐 자기 무덤 조성이었다는 얼간이 같은 황제가 제 명대로 다 살고 죽었다니!
그럼에도 명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명나라는 사실상 신종 때 망했다고 한다.
그야 사필귀정일터.
뿐만 아니라 생전에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지하궁전은 발굴되어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떼밀려 내려왔다 떼밀려 올라가는 장터처럼 변했다.
지하궁전 어디에 신종의 혼백이 있다면 필자 같은 별난 관광객의 힐난이 들리리라 .
명13릉이 위치한 지역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좌청룡 우백호 명당자리라고 하건만 신종 대(代)에 이르러 명나라의 운이 다한 것을 보면 아무리 뛰어난 명당자리도 사치스럽고 부패하고 무능한 황제의 후손에게는 효험이 없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세월무상을 느끼게 한다.

그런 그에게도 공(功)이 있으니 지도자가 무능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까지 망하게 한다는 교훈을 남긴 것과 절대로 선견지명이 있어서 한 일은 아니겠지만 호화로운 지하궁전을 축조함으로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관광수입을 올리게 한 점이다.
이 같은 교훈은 중국역사에서 무수히 많은데 전날에 본 자금성이 그렇고, 다음 날 방문한 이화원도 마찬가지였다.
당대에 최고의 권력과 사치를 누렸던 그들은 자기들 삶이 후세에 어떻게 회자되는 가운데 관광 상품화 될 것을 티끌만큼이라도 예견했을까?

어쨌든 지하 27m 지점에 축조한 지하궁전은 진시황에게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한국적인 시각으로 보면 역시 대단하다.
하지만 관광객들이 호기심과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돌아 나온 지하궁전이 실은 원래의 무덤이 아니라 발굴한 이후에 관광객들에게 공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조품으로 꾸며진 것이라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정말 형편없는 얼간이가 중국 천하를 지배했다는 사실에 괜스레 열 받아 있던 중에 가이드로부터 그 말을 듣자 마치 사기를 당한 기분이 든다.
참으로 중국적인(?) 발상이다.

오후 일정은 용경협과 만리장성 관람이라서 그나마 기대를 모았는데 만약 용겹협 관람이 없었다면 이번 여행은 최악이었을 것이다.
용경협은 이번 여행에서 유일한(?) 자연 관광지로서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협곡인데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명13능에 대한 실망감을 어느 정도 보상해 주었다.
실은 필자의 경우 용경협만 처음일 뿐, 이미 다 가 본 곳이었기 때문에 아내를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면 공짜일지라도 오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용경협은 자연이 만든 협곡에 댐을 막았으니 댐과 유람선은 인공이지만 강 양안의 까마득한 기암절벽은 자연 그대로다.
댐을 막은 이유는 수력발전을 위함이었는데 강택민 주석이 이곳을 방문하여 광광지로 개발할 것을 지시하여 현재의 관광지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산등성이와 절벽 군데군데에 붉은 색으로 ‘용경협(龍景峽)’ ‘강택민(姜澤民)’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댐 위로 물길을 따라 협곡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유람선 투어는 약 40분정도 소요되는데 굽이를 돌 때마다 양쪽으로 늘어선 수백 길 괴암절벽이 연출하는 대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이번 여행의 백미였다.

멋진 풍경 사진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갔다가 마땅히 찍을 곳을 찾지 못해서 실망하고 있던 터라 연신 셔터를 눌러댔는데 협곡이라서 그늘이 많이 지는 탓에 빛의 방향과 밝기가 수시로 바뀌는 조건에서 절경을 제대로 담을만한 실력이 되질 않는다.
이럴 경우는 자동카메라로 마구 찍는 것이 나을 일이다.

이어서 만리장성 팔달령 구간을 방문 했다.
이곳 역시 인간이 만든 축조물로는 불가사의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곳이지만 전에 가 봤기도 하고, 익히 알려진 곳이라 감동은 예전만 못하다.
다만 전과 달리 케이블카를 놓아서 관광객들이 보다 빨리, 쉽게 더 높고 먼 곳까지 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달라진 모습이다.

어디를 가나 엄청난 인파 때문에 고즈넉한 여행기분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류가 만든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숨결을 느끼는 것은 고사하고, 좌판을 늘어놓은 저자거리 노점상보다도 더 복잡하고 시끄러운 것이 중국의 유명한 관광지 풍경이라면 과한 표현일까?
그렇지만 만리장성은 다시 봐도 감동이 살아있는, 인류가 만든 축조물 중에서 불가사의로 생각되는 실로 대단한 역사의 현장이다.

만리장성은 실제로는 6,300여 km가 된다고 하니까 우리가 전통적으로 쓰던 거리 개념으로는 일만 오천리가 넘는 거리다.
그 규모의 크고 방대함에 놀라는 한편으로, 끝없이 이어진 장성을 보노라면 저 험준한 산맥을 따라 어떻게 축성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노예처럼 일하다 이름도 없이 죽어갔을 전쟁포로 및 힘없는 백성들은 죽음이 아니고는 그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었던 수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니 시대를 잘못 타고난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운명이라고나 할까!

장성 사진을 멋지게 찍어 보려고 렌즈까지 새로 구입했는데 저녁 무렵에 서쪽을 바라보는 위치라서 역광이 너무 강하다.  
마음 같아서는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내려와도 다른 일행들 시간에 맞출 수 있겠는데 가이드는 도저히 안 된다고 한다.
이런 사진은 시간과 위치가 중요한데 다른 일행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되므로 순순히 안내에 따르다 보니 역시 마음에 드는 사진은 찍지 못하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시내에서 단체로 발 마사지를 받는 코스가 있었다.
갓 스무 살 내외의 선남선녀들이 일정한 기술 교육을 받고 발 마사지자로 취업을 한다는데 남자 손님은 여자가, 여자 손님은 남자가 맡는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남여가 바뀌어야 기(氣)를 받는다나?
재미로 장난삼아 들어가서 발을 내놓고 앉지만 막상 남의 발을 씻기고 주무르는 그네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다 똑같은 사람인데 마치 돈으로 상대방의 인격을 사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다.
이런 느낌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여러 사람이 발의 피로를 푸는 시원함이 있기는 하지만 마음은 왠지 개운치 못하다고 실토했다.
그런 미안한 마음이 별도의 팁을 후하게 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 또한, 가진 자(?)의 자기 과시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가이드는 팁을 너무 많이 주면 애들 버릇을 잘못 들인다며 2~3천원 이상 주지 말라고 가이드라인을 당부하는데 아마도 앞에서 필자가 느꼈던 인격적인 미안감 때문에 팁을 더 주려는 생각을 갖는 것 같다.  
아홉시가 넘어 늦게 숙소로 돌아왔는데 어제 밤의 온천욕이 좋아서 두 가족이 다시 찾아가 자정 무렵까지 보냈다.


[마지막 날 10월 26일(목) 갬]

벌써 마지막 날이니 시간이 빠르다.
아침에 이화원 관람에 나서면서 호텔 체크인하고 짐을 다 꾸렸다.
어제 춥다기에 옷을 잔뜩 껴입었다가 예상과 달리 날씨가 춥지 않아서 다들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는데 오늘은 날씨가 매우 쌀쌀하다.
더구나 15분정도 배를 타기 때문에 더욱 추위에 노출되는데 감기 들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이화원은 중국역사에서 3대 여걸(측천무후, 서 태후, 강청 - 모택동의 처)의 하나로 꼽히는 서 태후의 별장이다.
서 태후는 황제가 된 아들을 대리하여 수렴청정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청나라 말기를 다스린 인물인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엄청난 사치를 했다고 한다.
이화원은 그녀가 누린 사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는 하나의 사례인 셈이다.
자금성의 다섯 배에 이르는 면적에 여름 별장을 조성하면서 커다란 호수를 인공적으로 파고 거기서 나온 흙을 쌓은 것이 하나의 산이 되었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서 태후는 이화원을 조성하면서 당시 해군제독이었던 리홍장으로부터 수천만 위엔의 군자금(국방예산)을 뇌물로 상납 받았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함대는 청일해전에서 전멸하다시피 대패함으로써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니 서 태후는 자신의 사치를 위해 나라를 말아먹은 셈이다.
명나라를 망하게 한 신종황제처럼 청나라 말기의 서 태후 역시 후세를 위한 교훈과 문화유산을 남기고자 했음인가?

중국을 다스리던 황제들이 권력의 상징인 황궁을 엄청나게 크고 호화롭게 짓고, 사후세계를 위해서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무덤(지하궁전)을 만들기까지는 정복당한 민족의 희생과 한,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들의 고난이 고스란히 녹아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계가 인정하고 자랑하는 중국의 문화유산을 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규모의 방대함에 감동하면서 한편으로 그러한 결과물이 있기까지의 민초들의 고통과 수난을 생각하면 탄식을 금할 길이 없다.
이래서 감탄(感歎)이란 말이 만들어졌음인가?

첫 중국여행 때의 느낌이 감동(感動)으로 채워졌다면 이번 여행에서는 탄식(歎息)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