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정치/질고지칼럼

내일칼럼1/ 이시대 메시아는 '바보'

질고지놀이마당 2009. 9. 8. 14:00

이 시대의 메시아 ‘바보’ / 2009. 6


존경받아 마땅한 어른에게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불경스럽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故 김수환 추기경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바보’라 부르는 것은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된 현상이라 생각한다. 생전에 당신들께서도 ‘바보’로 불리거나 스스로 바보라 칭하는 것을 자신의 삶에 부합하는 표현으로 여기셨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바보’라는 의미는 보통사람에 비해서 지능이 좀 모자라고 판단력이 부족한, 한마디로 어리석은 사람을 지칭한다. 한편으로는 고지식할 정도로 우직하고 정직한 사람, 손해인 줄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도 ‘바보’의 범주에 포함된다.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바보’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손수 그린 그림에 ‘바보야’라고 써 놓으신 자화상의 공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직 정의 평화 무욕 사랑 헌신 등  언행일치의 삶을 살다 가신 추기경님이 바보라니?


‘바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완결은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였다. 그가 걸어 온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일반의 셈법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바보 같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세상은 그의 이름 석자 앞에 바보라는 호칭을 붙여 '바보 노무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종래의 바보라는 개념에서 안티와 비아냥의 표현으로, 한 쪽에서는 凡人들이 할 수 없는 험난한 길을 자청해서 걷는 데 대한 안쓰러움을 담아 지지의 마음으로...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 사회 지도층에 두 부류의 바보가 존재함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확고한 신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메시아와 같은 삶을 사는 바보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부정과 부패, 반칙도 마다하지 않으며 권력과 축재를 탐하다 종래에는 패가망신하는 바보.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로서 노동운동 후견(?) 역할을 넘어 ‘시대의 풍운아’ ‘세기의 승부사’로 불리는 정치인으로 걸어 온 길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그의 '바보 같은 정치적 선택'은 당연한 결과로서 실패와 좌절이 따랐지만 항상 대의를 지켰기에 국민들은 그를 주목했고,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직 수행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원칙고수는 노동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재임기간 내내 보수 기득권 세력은 물론 노동계로부터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필자 역시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받은 실망과 섭섭함의 결과로 비판대열에 가세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인의 생전에 지지와 비판을 오락가락한 사람들, 도와주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들이 전 국민적인 추모열기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필자는 고사성어 ‘必死則生’ 과 ‘殺身成仁’을 생각했다. '바보 노무현' 이었기에, 혹은 '노무현 다운 선택'을 통해 현 정권의 상상을 초월한 정치보복을 만천하에 고발했다. 작게는 가족과 자신을 따르던 정치적 동지들, 크게는 지리멸렬 상태인 야당을 살리고 지역주의 청산과 통합, 민주주의를 완성하라는 유지를 남겼다. 죽은 제갈공명이 자신의 사후를 내다 본 계책으로 산 사마중달을 물리쳤다는 삼국지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제 '바보'라는 호칭은 그 대상자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따라서 어느 修辭보다도 빛나고 귀한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순신 장군이나 다산 정약용 선생 같은 분들도 '바보'의 반열에 포함 될 것 같다. 아직 우리사회는 불의에 맞서 반칙하지 않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려면 매우 불편하고 어렵다. 대신 적당히 타협하고 반칙도 슬금슬금 하면서 지름길을 걷고자 하는 유혹이 도처에 존재한다. 따라서 국민들이 편안하려면, 정치가 발전하려면, 나라가 부강하려면, 불의와 반칙과 타협하지 않고 손해 보면서 고난의 길을 마다않는 바보 지도자가 각계에서 많이 나와야 한다. 민초들은 더 큰 바보 지도자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