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정치/질고지칼럼

천수를 누리시고 별세하신 장인어른을 추모하며

질고지놀이마당 2015. 3. 6. 13:12

 

 

새벽에 장인어른께서 별세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향년 95세, 그러니까 천수를 누리신 것이고,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호상이다.

나 자신도 이미 얼마전부터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어서인지 담담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 애통해 한들 고인께서 아시는 것도 아니고, 다만 살아 생전에 더 잘 모시지 못한 것이 회한으로 남는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요양병원에 모신지가 7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한 말년을 보내셨다는 점이다.

장모님이 14년 전에 먼저 돌아가셔서 더욱 그랬다.

그 점만 뺀다면 장인어른께서는 자식복과 천수복을 누리신 분이다.

슬하에 4남4녀, 8남매를 두셨고, 2세와 3세까지 합하면 숫자를 한참 헤아려야 할 정도로 자손들이 번창했다.

 

2007년 12월 7일, 시골집에서 모인 고인의 생신날 기념사진이니까 요양병원으로 가시기 전 시골집에서의 마지막 생신 모임

 

조실부모한 나에게 있어서 처부모는 부모님 몫까지를 포함하는 분들이셨다.

솔직히 아내와 나는 처가에서 물질적으로 도움받은 것 하나 없이 단칸 셋방부터 시작했지만 처부모님이 살아계신 자체가 감사의 조건이었다.

내 생활이 어려울 때는 자주 찾아뵙기 어려웠지만 내 차를 갖게 되었을 때 가장 기뻤던 것이 기동력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너무 멀고 교통이 불편해서 찾아가기 힘들었던 부모님 산소를 찾아간 것과

그 다음으로 아이들 태우고 처부모님을 찾아 뵌 것이었다.

마치 금의환향하는 기분으로...

 

장모님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뒤에도 장인어른은 정정하시고 완고하셨다.

자식들에게 짐되기 싫다며 혼자 밥을 지어먹으시며 7년을 버티셨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혼자 계신 것이 늘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자식들 누가 선뜻 내가 모시겠다고 나서기가 쉽지않은 세태다.

결국 2008년 봄에 자식들이 의논끝에 요양병원에 모셨다.

 

장인어른을 요양병원에 모시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왜그리 무겁던지, 불효라는 마음에 돌아오는 내내 아내는 눈물바람이었다.

내 마음은 요양병원에 모시더라도 가깝게 돌 볼수 있는 울산으로 모시자고 아내와 마음을 모았지만 아들들 입장이 있었다.

그러나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 막상 내 삶으로 돌아오면 내 생활이 우선인 법이다.

 

장인어른은 명절 때, 휴가 때, 생신 때나 한번씩 의무감에서 찾아뵙고 그것으로 할도리 했다는 합리화의 방편으로 삼았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점점 기력이 쇠약해 지시고 기억력도 가물가물, 아들 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갔다.

그런 가운데도 내가 가면 "건의아배, 나좀 사호리로 데려다 줘"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시곤 했다.

사호리는 장인어른께서 태어나 평생을 사신 고향이다.

 

외로움과 고향을 그리는 절박한 마음은 당신께서 거동조차 못하셔서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고향에만 가면 힘이 생겨서 바깥출입도 하고, 밥도 손수 끓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 바람과 졸라댐이 얼마나 줄기찬지 찾아뵙고 나올때는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할 정도였다.

 

가장 회한으로 남는 것이 이번 설 연휴에 찾아뵙지 못한 점이다.

아내와 아들이 울산으로 와서 설을 보내는 바람에 아내랑 다음주말에 찾아뵙기로 일정을 잡았는데 그새 떠나셨다.

오호 통제라 부모님은 언제까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한을 남기게 되고 말았다.

 

부음을 듣고, 촌각을 다퉈서 달려가야 마땅하지만 오늘 나는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뭔지를 찬찬히 돌아보고 하나씩 정리하고 가려고 출발을 미뤘다.

예상못한 사고로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천수를 누리신 호상이기 때문이다.

한시간 먼저 장레식장 도착하는 것보다 오롯이 생전의 당신을 생각하며 고인의 명복을 엄숙하게 빌어드리고 싶다.

 

함께한 세월동안 담긴 추억들이 내 블로그에 비공개로 많이 담겨있다.

고향못지않게 푸근하게 다가오는 처가동네 풍경과 바닷가에서 조개파고, 물놀이 하던 추억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요즘의 경조사 문화에 대해 생각이 미쳤다.

 

장례식장까지 다녀가는 문상이 얼마나 민폐가 될지, 부의금 문화도 그렇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직장)인들에게 지금과 같은 경조문화는 언젠가 바뀌어야 할 풍습이다.

그래 마음만 받자.

지금 이순간 '문상을 가야하나 안가도 되나?  조의금은 어찌하나?' 고민하고 갈등하는 분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자.

대신에 잠시나마 엄숙한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길 바라자.

장인어른께서도 둘째 사위의 이 마음을 기쁘게 이해하실 것이라 믿는다.

 

멀리까지 문상오는 수고 대신에 문자나 카톡, 혹은 이곳에 와서 사이버 조문으로 대신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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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먼곳까지 문상오시는 수고 하지 마십시오.

개인적인 부조금도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이곳에 댓글로 조문글 남기시면 장례모시고 나서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이상범 삼가 올림

 

 

<비공개 금기를 깨고 공개하는 가족사진-2년전 모습>

 

"이게 누군지 아시겠어요?"

"이~~? 야가 누구여?"

 

쇠잔해지는 기력만큼이나 기억력도 가물가물, 8남매의 자식과 그 8남매의 2세 3세까지 늘었으니 다 기억하는 것은 무리다.

아들 딸과 며느리 사위도 다 기억 못하시는 상황이라 자신을 알아보는 자식은 웃음꽃이 피고 몰라보시면 퉁퉁 달게 되는 만남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장인어른께서 단 한번도 둘째 사위인 필자를 몰라보시는 경우는 없었다. 

      

  

  

        

    

 

 

 <3년전에 찍은 가족사진>

 

 

   

   

  

국제결혼을 한 내 딸이 외할아버지를 뵌 마지막 기념사진이 되었다.

내 딸의 딸은 외증조 할아버지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사진이고...